[431호 2014년 2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국립국악원 金 海 淑원장
지난 1월 2일 金海淑(국악73 - 77)동문이 국립국악원 제18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여성 국악인의 수는 많으나 3개 지방 국악원과 산하 단체를 포함해 6백여 명이 소속된 국립국악원을 이끄는 여성 수장의 탄생은 63년 역사상 처음이다. 가야금 연주자인 동시에 국악원 연구실장, 서울시 문화재 전문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를 지낸 金원장은 행정과 예술 현장의 실제를 이해하는 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취임 이후 쏟아진 관심 속에서도 그는 남원·진도·부산의 지방 국악원을 차례로 돌아보는 등 차분히 업무를 꾸려가고 있다. 지난 1월 24일 서울시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金원장은 가장 먼저 국악계의 숙원인 `국악의 대중화·현대화·세계화'를 과제로 제시했다.
“같은 뿌리인 북한 음악의 경우 일찌감치 서양음악에 맞게 악기를 개량하고 그것으로써 전통을 표현하려 고심했지요. 반면 우리나라는 비교적 잘 보존된 전통에 현대적이고 외래적인 요소가 공존합니다.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어요. 다만 대중화를 위해 예술의 본질을 벗어나거나 맹목적인 서구화, 국수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우리가 가진 요소들을 활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시대에 맞는 변용을 모색하되 우리 전통음악의 원형성과 정체성이 반드시 바탕이 돼야 한다는 원칙이다. 金원장은 서양음악에 익숙해진 대중의 `귀맛'을 끌어당길 국악의 참맛으로 장단의 묘미, 명주실과 오동나무 등 자연의 소재로 만든 우리 악기의 독특한 음색, 표현 양식인 시김새를 꼽았다.
“시김새란 쉽게 말하면 음을 꾸미는 `되새김'이에요. 화성적인 서양음악에서는 여러 음을 벽돌처럼 쌓아서 동시에 울리지만 우리 전통음악에서는 한 음을 가지고 흔들거나 밀어 올리거나 해서 `새겨 간다'고 합니다. 마치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 기와지붕의 곡선처럼, 음으로 아름다운 선을 그려 가는 것이지요.”
예술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 金단장은 “좋은 작품으로 대중의 호응을 받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에 연말쯤 樂·歌·舞 총체극을 발표하고 앞으로 국악원을 대표하는 레퍼토리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악가무가 종합된 소리극 형태는 한국 전통 예술 그 자체입니다. 국악원 산하의 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 창작악단, 지방 국악원을 모두 활용하고, 내용 면에서는 익히 다뤘던 옛 왕조 시대 주제와 달리 현대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꾸미려 합니다.”
그밖에 고궁 공연, 명인 발굴 무대, 생활 국악 공연 등 국립국악원이 준비한 수준 높은 공연을 통해 대중에게 친숙히 다가간다는 생각이다.
국악을 배운 언니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부터 가야금을 시작한 金원장은 가야금 산조의 한 갈래인 최옥삼류 산조를 함동정월 명인에게 사사하고 연주자로도 명성이 높다. 올해에도 이미 1년 전부터 요청을 받아 일본, 독일, 스위스에서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2012년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현지에서 가야금 산조 앨범을 발매한 바 있고, 현지인으로 가득 찬 독일 공연장에서 가야금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해외 활동을 할수록 金원장의 마음 속에는 우리 민족에게 내재된 탁월한 음악성과 우리 음악 고유의 예술성에 대한 확신이 자리잡았다. 그의 연주를 듣고 예리한 일본 관객은 “일본 음악보다 훨씬 풍부한 정서가 한국 음악에서 느껴지는데 왜 그런 차이가 나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타 문화권에서 직접 활동하며 우리 음악을 알렸던 그라면 서양음악이 주류로 자리잡은 한국 대중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 또한 쉽게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우리 음악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전통음악을 공부하며 더욱 그걸 느끼곤 하지요.”
그는 “문화란 단시간에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이지만 2년의 임기 동안 국악의 아름다운 기품과 가치를 드러내도록 노력하겠다”며 그에 호응하는 대중의 사랑을 당부했다.
金원장은 취임 직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모교에서의 추억을 묻자 그는 입학 당시 을지로6가에 자리했던 음대를 떠올렸다. “공강이면 근처 `덕수다방'에서 동기들과 수다를 떨었고, 학교 연못가에서 먹던 매점 라면이 참 맛있었다”며 운치 가득한 추억담을 펼치던 그는 새내기 시절의 발랄함을 그대로 간직한 듯 밝게 웃었다. 〈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