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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호 2014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대한민국예술원 柳 宗 鎬회장






 -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선출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취임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대한민국예술원법에 의하면 회장은 예술원의 업무를 관장하고 예술원을 대표한다고 돼 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소임을 다하겠다는 것밖에 별다른 소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동창회보 관계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니 솔직히 보람을 느낍니다.”

 - 회장님이 선출된 배경은 무엇이며, 또 어떤 점을 기대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예술원에는 문학, 미술, 음악, 연극·영화·무용 등 4개 분과가 있습니다. 초기에는 각 분과에서 돌아가면서 회장직을 맡았어요. 물론 선거라는 요식 행위는 거쳤지만 사실상 내정된 인물을 선출한 것이지요. 또 회장이 소속된 분과가 아닌 다른 분과에서 부회장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분과 순환제가 없어지고 각 분과에서 천거한 회원을 두고 선거를 하게 됐습니다. 문학 분과에서 오랫동안 회장을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 회장이나 부회장 경력이 없는 新人이라는 점에서 제가 덕을 본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예술원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자세한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술원법 제1조에 보면 `예술원을 설치해 예술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우대·지원하고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을 함으로써 예술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또 예술진흥에 관한 정책자문 및 건의나 국내외 예술의 교류 및 예술행사 개최가 그 기능이라고 돼 있죠.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원의 대표적 성격은 무슨 행정기관이나 집행기관이 아니고 국가의 상징적인 예우기관이란 것입니다. 선진국이 모두 갖추고 있고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제도요, 기관입니다.”

 - 회원 자격 조건은 무엇이며, 혜택은.

 해당 분야에서 30년 이상 종사해서 예술 발전에 공적이 현저한 사람이 자격 있는 것으로 예술원법에 적혀 있습니다. 현재 예술원 회원의 평균 연령은 78세입니다. 연로한 분들이기 때문에 수당을 받는 것이 가시적인 혜택이라 할 수 있어요. 소속감을 주는 것도 혜택이라면 혜택이지요.”

 - 회장님은 예술원 회원이 언제 되셨나요.

 “IMF 금융위기 때인 1998년에 회원이 됐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徐廷柱·黃順元·尹石重·金春洙·康信哉·趙炳華·田淑禧·徐基源선생 같은 분들이 생존해 계셨는데, 그 사이 모두 세상을 뜨셨지요.”

 - 앞으로 2년간의 임기 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원래 회원은 종신제였어요. 그러다 1980년대에 임기 4년으로 고치고, 4년마다 재신임을 받게 돼 있어요. 현저한 공적이 인정돼 회원이 된 사람을 다시 자격심사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요, 불필요한 일입니다. 재심사에서 탈락한 인사도 민주화 이후 없어요. 회원 종신제로의 환원이 당면 과제입니다. 기타 청사 확보문제 등 정책적 결단이 요구되는 사안도 있습니다.”

 - 지난해 11월 문화융성위원회 내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 위원장도 맡으셨죠?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해주신다면.

 말씀하신 대로 문화융성위원회 내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가 있습니다. 이는 인문학에 대한 朴槿惠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에서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제고하면서 인문정신이 국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설정하는 것이 당면과제입니다. 단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없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문제에 접근해야겠지요. 15명의 위원 가운데서 최고령자이기 때문에 사회를 보는 좌장이 된 것일 뿐이고 위원 모두가 균등한 소임을 맡은 것입니다.”

 - 지난해 8월 청와대 초청 인문학자들 오찬 모임이 있었죠? 그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역대 대통령 중 인문학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요즘 인문학이 땅에 떨어졌다'는 얘기가 많아 우리 모두가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혹시 질타를 하시는 것은 아닐까 긴장하고 갔는데 대통령께서 오히려 격려를 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날은 관료적인 분위기가 아닌 허심탄회하게 서로 이야기를 하는 아주 개방적인 분위기였습니다.”

 -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말씀도 나누셨는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통령께서 인문학적인 소양이 국민의 행복에 무엇인가 기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생각해 달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지요. 그런데 그것이 즉각적으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는 것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참 어렵습니다.”

 - 한국문학 평론의 거목으로서 50여 년의 삶을 평론가란 타이틀로 지내고 계신데, 이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영문과 학생일 때 푼돈 벌이로 번역을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비평적 에세이 비슷한 것을 썼어요. 1950년대 말은 문화적 황무지여서 글 쓰는 이도 많지 않아 비평적인 글을 쓰라는 주문이 들어왔어요. 주문에 응해 납품하다 보니 평론가란 호칭이 따라붙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수요와 주체의 공급이란 경제적 거래 사이에서 사회적 자아가 형성된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평생 교단에 섰고,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부업행위였지요. 정년이 되고 나서부터 사실은 글쓰기가 전업이 됐지요. 가르치는 것과 비평 행위의 친연성 때문에 두 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문학에서 `평론가'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요. 거대담론의 일환으로서 문학이 있어야 할 방식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문학을 인도하고 재단하려는 이도 있고, 문학 이해를 위해서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를 해명하려는 이도 있고요. 현재 평론은 점점 독자를 잃고 대학 문과 학생들의 리포트 작성 때의 참고문헌 역할이나 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는 형편입니다.”

 - 평론집 외에 수필집 `우수의 거리에서'와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를 내기도 했는데, 또 계획이 있나요.

 “`나의 해방 전후'`그 겨울 그리고 가을' 등의 회상록을 쓴 바 있습니다. 자기의 경험을 적으면서 그것이 우리 사회사에 기여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우리의 근접과거를 젊은 세대에게 실감케 하는 책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 새해를 맞아 동창회 및 동문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우리 사회 주류로서의 소임과 의무를 다하되, 지나친 선민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 반드시 자기 능력의 보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늘 의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진 = 邊廷洙기자·정리 = 林香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