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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2013년 6월] 문화 꽁트

金 河 鏡(국어교육64 - 68) 본명 金美順, 소설가 




 카페 탱고는 수봉산 진입로에 위치한 작은 카페다. `SINCE 1995'가 말해주듯 오영철은 이 카페에서만 20여 년의 청춘을 고스란히 묻었다. 이런 외골수 같은 주인의 고집과 철학은 건물 외관이나 내부 장식에 고스란히 배어들어 한눈에도 주변의 다른 새 건물들과 차별화됐다. 그렇다고 그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옛것만 고집하는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패셔니스타로 청바지와 빨간 티셔츠, 머리엔 검은 두건을 쓴, 튀는 패션으로 주위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최근엔 수봉산 일대 뉴타운건립반대 주민대책위원회 사무장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수봉구 지역신문 1면 톱 장식, 인터넷방송 검색어 1위로 수봉산 일대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손꼽혔다.

 오늘은 수봉대학교 신문사 학생 기자들이 취재차 그를 찾았다. 한 시간 가량 뉴타운정책과 대책위 활동에 집중되던 인터뷰가 마지막 질문 앞에서 멈췄다.

 “카페 주인과 대책위 사무장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아요. 그럼에도 행동에 나선 데에는 개인적인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보는데요. 그 얘기가 궁금합니다.”

 오영철은 약간 당황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털어놔도 될지, 아님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게 나을지 난감했다. 잠시 후 오영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뒤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려한 금속장식이 붙은 빨간색 아코디언을 들고 나왔다.

 주위가 일순 술렁이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색한 듯 오영철이 헛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학생들은 긴장한 채 오영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몇 년 전이었다. 11월의 마지막 주말 콘서트가 끝난 뒤 오영철은 손님도 없고 해서 혼자 아코디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 콘서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자신이 직접 무대에 서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야 뭐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규모는 작아도 종업원 없이 혼자 뛰다보니 24시간도 모자랐다. 도무지 연습할 짬이 안 났다. 그렇다고 `완벽한 무대연주'라는 원칙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전문 연주자를 초빙했으나 그마저 자꾸 사람이 바뀌는 통에 골치가 아팠다. 그날도 그만두겠다는 연주자 때문에 화가 나서 내가 하겠다고 큰소리치고는 아코디언을 잡고 씨름하던 중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등산객이 올라올 리도 없고 아무튼 기분이 이상했다. 중키에 마른 편이고 하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게 많이 초췌해보였다. 몸 어디가 아픈지,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고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결혼식 하객처럼 말쑥한 정장 차림에 불룩하고 묵직해 보이는 시커먼 비닐봉지를 들었으니 누가 봐도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노인은 들어서자마자 아코디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커피도 마시지 않고 계속 아코디언만 쳐다보길래, 오영철은 연주할 줄 아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아코디언을 처음 본다고 했다.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오영철을 빤히 쳐다보면서 한 번만 연주해 줄 수 없냐고 했다. 오영철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노인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졸랐다. 그래도 그가 응하지 않자 노인은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기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고비에 서 있다, 그런데 이 막중한 순간에 느닷없이 아코디언 소리가 발길을 막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초면에 누구에게 이런 무례한 억지를 부려본 적이 없는데, 왠지 자꾸만 염치 불구하고 조르게 된다. 그러면서 노인은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자신의 심경을 이해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게 아닌가.

 순간 오영철은 노인의 말에서 뭔가 절박함이 느껴졌다. 오죽하면 저럴까. 노인의 진심이 통한 건지도 모른다. 더 이상 거절하기도 민망하고 끝까지 거절했다가는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좀 부족하면 어떠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 들어주랴. 오영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아코디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탱고 `라 쿰파르시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가 끝날 무렵 오영철은 고개를 들고 노인을 쳐다보곤 깜짝 놀랐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은 불그레 상기되고 눈에서는 생기가 반짝였다. 한 열 살은 더 젊어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주가 끝나자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렬하게 박수를 치며 소년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더 놀라운 것은, 입은 환하게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눈에 진심으로 감동했다는 게 느껴졌다.

 명연주도 아닌데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에 눈물까지 흘리는 감동이라니…. 오영철은 분에 넘치는 반응에 민망하기도 하고 잠깐이나마 노인을 원망했던 게 부끄럽기도 했다. 연주하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는 게 진정한 음악이라고 했던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노인을 보면서 오영철 역시 위로 받았고 행복했다. 비로소 진정한 음악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경험한 것 같았다.

 오영철은 그 뒤부터 주말마다 무대에 올랐다. 노인과의 행복한 공감을 통해 진정한 음악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왔다. 발신인 이름은 엄영수, 바로 그때 그 노인이었다.

 “저는 정년퇴직 후 아내와 함께 귀농해 유기농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농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아내의 암 말기 소식이 들렸습니다. 부랴부랴 농원 문을 닫고 발이 닳도록 전국의 병원과 요양원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끝내 올 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집은 썰렁하기 그지없고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짓눌렸습니다. 무엇보다 밤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몇 달 동안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독한 술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비닐 가방에 나일론 줄을 한 묶음 넣고 산으로 향했습니다. 나뭇가지에 나의 마지막 생명을 바치려던 겁니다. 나무 밑에 시신을 묻어 수목장도 치르는데, 나뭇가지에 시신을 의탁한들 어떠랴 싶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그날 제 발길은 카페 앞에서 멈춰 버렸습니다. 빠르고 경쾌한 탱고의 선율이 쿵쿵 울리면서 무겁고 침울한 죽음에 억눌렸던 저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여지고, 발이 저절로 까딱까딱 박자를 맞추게 되더군요. 딱딱하던 머리가 부드러워지고 차가웠던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온몸으로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삶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벅찼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근데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슬퍼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칠십 평생 음악이 뭔지도 몰랐고 느낄 줄도 몰랐습니다. 음악이란 게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바로 옆에 가까이 있었는데도 까맣게 모른 채 칠십 평생을 살다니, 순간 울컥 목구멍으로 뭔가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메어왔습니다. 몸은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데 가슴은 칼로 저미듯 아파왔습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이 나이에도 아직 모르는 게 이렇게 많다니요. 알아야 할 새로운 게 남아있다니 참 놀랍습니다. 그날 산에 올라가 목을 맸더라면 음악을 모른 채 죽었을 테지요. 그 생각을 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음악을 알고부터 세상이 그전과 엄청나게 달라 보였습니다. 세상은 정말로 살기 좋은 곳이구나. 그런 세상을 굳이 서둘러 떠날 필요가 있을까. 변덕스러운 우연 탓에 죽음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다음 달 아니면 내년, 혹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이를테면 선물 받은 것, 공짜로 덤으로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선물 받은 삶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은 날마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라고 합니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 서 본 사람이라면 새로운 삶의 시작이 진정으로 뭘 의미하는지 알 거라고 합니다.

 제가 오만했는지 모릅니다. 생전 몰랐던 음악을 알고 직접 연주하면서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아, 사람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변하는 거구나.”

 (추신 : 2주일 전 아코디언 강습소에 등록했습니다. 언젠가 카페 탱고에서 연주할 그날을 위해 불철주야 열심히 연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영철은 편지를 접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첨엔 나도 뉴타운을 찬성했습니다. 걸핏하면 문 닫고 싶단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때였지요. 근데 노인을 만난 뒤로 그 입버릇이 싹 사라졌습니다. 사실 그전엔 왜 카페를 하는지도 몰랐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노인을 통해 눈을 뜬 겁니다. 이제 나에게도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 : 1915년 우루과이의 마토스 로드리게스 작곡. 아르헨티나 속어로 `가장행렬'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