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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 2013년 5월] 문화 꽁트

姜 信 盛(영문55 -60) 前駐칠레 대사, 소설가  




 나는 안과 의사다. 비교적 잘 나가는 의사다. 하루에 1백여 명의 환자를 본다. 그 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니 그 중에는 좀 엉뚱한 환자도 있다. 눈병 치료를 의학적인 차원에서보다는 삶의 의미와 연관지어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김 씨다. 김 씨는 3개월 전 처음 대할 때부터 내 흥미를 끌었다. 좀 마르긴 했어도 수려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눈이 특별했다. 움퍽 들어간 눈이 창백한 얼굴에서 끔벅일 때를 보면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저런 눈을 하고 땅을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내 의심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님이 곧 확인됐다. 진찰을 마치고 그의 눈이 백내장을 앓고 있으며, 그 질병은 노화에서 오는 것이라고 일러주자 그는 얼굴색을 싹 바꾸면서, “저는 아직 오십대 초반인데 노안은 무슨 노안입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인체는 오십이 넘으면 노화한다. 그 사실을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어이없어하는 나를 본 그는 한 발 물러났다.

 “내게 백내장이라니, 이해가 안 됩니다만 의사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치료를 받으셔야 하지요. 우선 백내장이 진행되는 것을 방지하는 포소도라는 안약을 드리겠습니다. 그걸 써보고도 낫지 않으면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시무룩하니 약 처방전을 들고 돌아갔다. 나는 비틀거리며 나가는 그의 등을 향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 염주를 굴렸다. 나는 불교를 조금 공부한 인연으로 염주를 애용한다. 염주를 손에서 돌리면 손이 부드러워지고 마음도 가라앉기 때문이다. 심신을 그런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집도하는 의사에게는 필수적이다.

 1개월 쯤 후에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 눈 수술을 해야겠습니다. 빨리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눈을 다시 세밀히 검사했다.

 “현재 상태로 봐서 수술하기에는 좀 이른 것 같군요. 당분간 안약을 써가며 기다려보지요.”

 “아닙니다. 서둘러주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완강했다.

 “왜 그렇게 조급하십니까? 지금 심히 불편하세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눈앞이 흐려진다는 것은 세상이 흐려진다는 것이고, 세상이 흐려진다는 것은 내가 흐려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나는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하도 진지하게 나오기 때문에 나는 눙치는 기분으로 한마디 했다.

 “그 대신 눈앞의 추한 것을 보지 않아도 되니 좋은 것 아닙니까? 허허….”

 “아닙니다. 추한 것을 안 보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다 내가 사모하는 아름다움마저 못 볼까 그게 걱정이 됩니다.”

 “사모까지 하는 아름다움, 그런 게 있습니까?”

 그는 내 말은 귓등으로 듣고 빨리 수술을 해달라고 졸랐다. 그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앞당겨 수술을 해주었다.

 그 후로 그는 수술의 예후를 검진받기 위해서 일주일마다 한 번씩 나를 찾아왔다. 올 때마다 이제는 돋보기 없이 책을 볼 수 있다고 좋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수술을 받을 걸 그랬다고 후회도 했다. 백내장 수술은 눈의 흐려진 수정체를 깎아내고 거기에 인공수정체를 갈아 넣는 것이다. 요즘 인공수정체는 질이 좋아 그걸 끼면 마치 눈에 망원경을 낀 것처럼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일 정도로 시력이 확대된다.

 수술을 받고 좋아하던 그가 한 번은 와서 도전적으로 나왔다. 안색이 거칠고 어두웠다.

 “선생님 내 눈 말입니다. 수술 잘 된 것입니까?”

 “잘 됐지요. 왜, 문제가 있습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봐서는 안 될 것이 보여진다는 것이지요.”

 “안 보이던 것이 보이면 그건 세상을 더 밝게 볼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건 좋은 일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 아름답게만 보였던 것이 이제는 그렇지 않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건 괴로움입니다.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니까요. 아름다움을 잃는다는 것은 그것에 의지해서 존재해 왔던 저 자신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또 자기를 잃는다는 말이 나오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사정했다.

 “선생님 내 눈을 수술 전의 눈으로 복원할 수 없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그렇게 집착하는 아름다움의 정체가 뭣이오?”


 “그럼, 제 말이 장황하더라도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 제 말을 이해하시면 원래의 제 눈을 되찾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실은 제가 사모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젊음과 아름다움의 표상입니다. 사실 저는 제 구원의 여인을 찾아 평생을 편력했습니다. 편력이란 말 오해 마십시오. 그저 짝사랑 행각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 평생의 편력을 마감시키는 종착역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분을 만난 이후부터 세상에는 눈 하나 팔지 않고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지내왔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가끔 만나 문학 이야기나 하고 식사하는 정도입니다. 그분은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굴지의 문학상을 탄 작품을 여러 편 썼습니다. 저도 소설가로 행세는 합니다만 그분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분은 내 연인이자 문학의 사표이기도 합니다. 연인이라는 말은 내가 쓰는 용어이지 그분이 들으면 웃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분을 만난 이후부터 내 방황하던 영혼은 평상심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뭐 헤어지기라도 했소?”

 “그게 아니라 눈 수술이 문제입니다. 그분은 제게는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술하고 보니 그분 역시 시간의 존재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젊고 곱게 보이던 얼굴에 웬 주름살이 그렇게 많이 보입니까? 이마에, 눈가에, 인중에 시간이 낸 흠집이 많이 나있는 것이 보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비단 같이 포근하고 매끈하던 얼굴 바탕이 지금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흐린 벽지처럼 보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분의 생일을 조사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보다 15살이나 연상이었습니다. 서너 살 위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차가 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 연령차가 왜 지금은 보이는 것입니까? 눈 수술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어쨌든 수술한 눈으로 보면 이전의 그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어떻게 되는지 선생님 아시죠. 그러니 선생님, 제발 제 눈을 옛 눈으로 돌려주십시오. 그분의 옛 모습을 되찾고 싶습니다.”

 “당신은 보이는 것, 즉 相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상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왜냐면 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늘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은 보는 눈이 다름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가에서는 상을 환영이라고 하면서 상을 상으로 보지 않아야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불교경전인 금강경의 한 대목을 인용해 내 말에 신빙성을 주고자 했다. 그래야 그가 내 말을 믿고 복원 어쩌고 하는 것을 접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그는 희한한 이론을 제시했다.

 “상이 변하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면 그러면 상과 보는 눈을 고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 눈을 이전의 눈으로 복원해서 고정시키면 그분의 전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도 영원한 실체로 고정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 눈을 복원해 주십시오.”

 “질병을 복원한다는 것은 의사의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그걸 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힘없이 떠났다. 발이 휘청거렸다.

 나는 그것으로 김 씨와의 인연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또 그가 나타났다. 나는 속으로 찔끔했다. 또 복원수술을 해달라고 떼를 쓰면 어쩌나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선생님 오늘은 끊었던 안약을 탈 겸 선생님께 감사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전과 달리 화기까지 차 있었다.

 “전번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비록 내 눈을 고정시킨다 해도 눈에 보이는 상은 고정될 것 같지 않더라고요. 시간이 그걸 허용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저는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같이 절망하는 인간을 위해 자기의 젊고 아름다운 상을 영원히 고정시켜서 보여줄 고매한 분신을 마련해 두었더라고요. 그분의 소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고 있는 그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건 저에게는 재생과도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설 속의 그런 재회를 인도한 것은 육안은 가당찮고 여래를 볼 수 있는 심안이었습니다. 그 심안을 뜨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는 처방전을 들고 떠났다. 이번에는 자세가 반듯했다. 나는 그를 바래다주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독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