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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호 2013년 3월] 문화 꽁트

玄 林 鍾(상학56 - 60)수필가




 내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합격하고 입학한 뒤 첫 강의시간이 철학시간이었다. 권 모 교수는 강의 시작하자마자 `우연'이라는 말은 철학에서는 없다고 외쳤다. `우연히 누굴 만났다'라는 말은 그가 그 곳에 갔기 때문에 만난 것이므로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 강조했다.

 나는 지금도 이 우연이 없다는 철학교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이 겪은 우연이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 때 초등학교 5학년인 내가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난해 소위 `폭도새끼'생활을 하다가 군인에게 붙잡혀 내려올 때 중산간지대에서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그 때 그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할 수 있었고 귀순자 수용소에서도 빨리 나올 수 있었으며, 또 다시 학교로 복학할 수도 있었다. 선생님은 선무공작대원으로 군부대에 위문 공연하러 올라가는 길에 산에서 잡혀 내려오던 나와 마주친 것이니 정말 우연이 아니고 무엇인가.

 6·25전쟁 때 17세의 어린 나이로 전선에 나아가 왼쪽 다리에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다음 몰려오는 적의 포위에서 재빨리 피하려고 큰 바위 밑으로 숨어들었다. 몰려온 적들이 부상당한 아군의 양눈과 심장을 총검으로 찌르며 확인 사살하느라 미쳐 날뛰면서도 정작 내가 숨어 있던 바위 밑은 수색하지 않아 내가 살아날 수 있었다. 한 시간 이상 휘젓고 날뛰던 그들이 떠나고 난 후 조용해지자 슬금슬금 기어나와 보니 내가 숨었던 바위 위에서 인민군 지휘관이 서서 지휘했기 때문에 인민군 졸병들이 높은 놈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아 내가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닌가? 인민군 지휘관이 내가 숨은 바위 위에 서서 지휘하라는 필연이 있었을까?

 내가 부상당한 후 후송되는 야전병원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육군병원에 가면 무조건 부상당한 다리를 잘라 버린다는 것이다. 군의관들이 의대 1∼2학년 수료생들이라 어려운 수술을 피하고 절단해 버린다는 말이다.

 육군병원에 도착해 수술실에 들어가자 군의관에게 다리를 자르지 말고 수술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군의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아서 한다며 군의관은 마취 명령을 내렸다. 수술이 끝나고 전신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내 다리는 잘리지 않은 채 깁스로 감겨져 있었다. 알고 보니 군의관은 내 다리를 자르려 톱을 갔다 대는데, 그 때 나는 마취상태에서 헛소리를 했다고 한다.

 “천주님! 제 다리를 자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성모 마리아님! 도와 주십시오!”라고…. 마침 나를 마취시킨 여자 간호병이 천주교 신자여서 이를 지켜보다가 마음이 움직여 군의관에게 다리를 자르지 말고 총알 뽑는 수술을 하도록 설득했던 것이다. 수술이 어려워서 시간은 더 지체됐지만, 내 다리는 건재할 수 있었다. 전쟁통의 육군병원에서 이런 우연으로 천주교 신자인 간호병의 도움을 받았으니 기막힌 인연이 아닌가?

 6·25전쟁에 참전하고 부상으로 명예제대해 돌아와 USIS(미국 국무성 주한미국대사관 제주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였다. 공보원에 와서 전시물을 관람하며 오랜시간 홍보물을 구경하는 피난 온 학생을 만나 사귀게 됐다. 그는 경기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그 학교에서 1등만 하던 수재였는데 피난 와서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와 친하게 되자 나는 내가 기거하는 미국공보원 숙직실에서 같이 잠을 자도록 공간을 내줬다. 밥은 집에 가서 먹고 오라고 했다. 사실 그 당시 내 식사란, 꽁보리밥에 마늘장아찌밖에 없었으니 그에게 나눠주기에도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나와 같이 지내게 된 그는 놀랍게도 밤 12시까지 공부하고 아침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또 공부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우 규칙적인 공부습관이었다. 3개월쯤 지나자 그는 나에게 “너는 지금처럼 일찍 잠자고 늦게 일어나서 언제 공부를 할거냐? 이와 같은 생활을 계속한다면 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가르칠 터이니, 나를 따라서 공부를 같이 하자”고 매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나보다 달랑 열흘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였지만, 중학교 3학년인 나와는 학년으로 3년이나 선배로 앞서 있었다. 나는 전쟁터에 갔다 오기도 했지만, 공부실력도 형편없이 뒤쳐져 있던 상태였다. 그 뒤로 그의 헌신적인 가르침과 나의 노력이 결합해 나날이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부산에 피난 내려와 있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에 합격해 제주를 떠났다. 서울 수복 후에는 모교인 경기고등학교에 가서 그 학교의 주말 모의고사 문제지를 구해다 매주 우편으로 나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편지로 `이 문제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실제로 시험 보듯 시간 맞춰서 풀어 보아라. 60점 이상 맞게 되면 서울대에 합격 가능하다'고 적어 보냈다. 그의 헌신적인 후원 덕택으로 나는 오현중·고등학교 6년을 야간생으로 그것도 밤에는 영화상영차 시골을 돌아다녀 허구한 날 결석만 했던 내가 서울대 상대에 합격하는 행운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와 내가 만난 것은 金日成의 남침덕(?)이었지만, 정말 우연한 인연이었다.

 1960년 3월 8일 결혼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농업은행에 응시한 후 필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였고 아직 면접이 남아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려 제주로 내려오면서 면접통지가 오거든 전보(당시는 전화가 없었음)로 알려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했다. 장가간 다음 날(3월 9일) 낮 12시경 전보가 왔다. 3월 10일 10시까지 농업은행 본점으로 출두해 면접을 치르라는 내용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당시에는 항공편이 없었으므로 제주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오늘 저녁때 목포로 가는 배를 타고 목포에서 뒷날 아침 서울 가는 기차를 타면 저녁 무렵에야 서울역에 도착 가능했다. 꼬박 24시간이 필요한데, 내일 아침 10시까지 무슨 수로 서울에 갈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하며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제주도의원 J씨와 마주쳤다. 그 순간 우리 머리 위로 군용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이 보였고, 나는 J의원에게 저 비행기가 웬 비행기냐고 물었더니

 “3·15 정부통령 선거 독려차 내려온 임 모 국회부의장을 모시러 오는 거야”하는 것이다.

 “저 비행기, 탈 수 있게 해 주세요”하고 부탁하자, “같이 비행장에 가 보자”고 하여 둘은 비행장으로 뛰었다. 국회부의장 일행과 제주도지사 등 유지 일행이 기념사진 찍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J의원이 사진찍는 일행 속에 끼어 있으면서 나를 향해 “현 군! 국회부의장님 가방을 냉큼 비행기에 싣지 않고, 뭘 그리 우두커니 서 있는 건가?”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얼른 가방들을 들어 비행기에 운반해 드리니, 공군병사들이 받아 올렸다. 가방들을 다 올리고 또 다시 비행기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J의원은 “올라가서 짐 정리하지 않고 뭐 하는 건가?” 하고 다시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제야 공군병사가 내 손을 잡아 비행기 안으로 올려 주었다.

 기념사진 촬영이 끝난 국회부의장 일행들이 모두 비행기에 오르자, 비행기는 바로 이륙해 곧장 서울 여의도비행장까지 날아갔다. 비행기 안에 있던 공군들은 나를 국회부의장 수행원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J의원은 공군당국에 나를 비행기에 태워달라고 부탁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으므로 요령을 부린 셈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 보는 비행기를, 게다가 공짜로 탄데다가 시간 안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해 면접시험도 놓치지 않았다. 우연히 길가에서 J의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됐을까? 국회 부의장 일행을 태울 비행기가 마침 그 순간에 알맞게 제주에 왔던 것은 또 얼마나 놀라운 우연인가?

 2005년 5월 우리 부부는 중남미 6개국을 18일 동안 여행했다. 마지막 날 페루에서 밤 12시에 미국 LA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그 비행기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출발해 페루를 경유하는 비행기라서 탑승객들이 이미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우리 내외가 배정받은 자리에 도착해 보니, 창가 자리인 우리 좌석에 앉기 위해서는 통로쪽 좌석의 손님을 깨워야만 했다. 그 손님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한잠에 빠져 있었다. 미안스러워도 조심스레 깨웠더니 눈가리개를 벗으면서 나를 쳐다본 그녀는 “할아버지!”하고 소리지르는 것이 아닌가. 칠레로 이민 간 친족손녀 내외가 LA로 가는 길이었다. 그 큰 비행기안에서 우연히도 이민 간 괸당(친족)을 만나다니….

 나는 위기의 상황에서 우연히 도움을 받았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우연히 맺은 인연으로 지금까지 우정을 이으며 살아왔다. 이런데도 정말 우연이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