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호 2013년 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낡은 도서관 건물 손볼 날 기다려

학창시절 밤늦게 공부하다 도서관 문을 나섰을 때 싸늘한 공기에 묻어오던 밤의 향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동숭동 세대의 막내인 나는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있던 육중한 도서관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때 맡은 밤 향기에는 본관 앞에 서있던 두 그루 마로니에 향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공부를 업으로 삼는 내게 도서관은 평생 제2의 집이나 마찬가지이다. 서양사를 공부하다 보니 세상 많은 곳을 돌아다니게 되고 곳곳의 도서관을 볼 기회도 많았다. 이상한 취미지만 낯선 곳에 가면 나는 도서관과 묘지를 둘러본다. 베네치아의 공동묘지에서 스트라빈스키를 발견하고 동베를린에선 헤겔을 만날 수 있었다. 런던의 하이게이트에 있는 마르크스의 묘도 찾아보았다. 그들 묘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놓고 간 꽃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이 세상을 떠난 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누군가가 내 무덤을 찾아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도서관은 묘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삶에 대한 다짐을 부추기는 곳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만난 도서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1호는 뉴욕 공공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 많이 이용해 정이 들기도 했지만 번화가인 5번가에 떡 버티고 서있는 웅장한 돌 건물은 정말 위풍당당했다. 대리석 계단과 높은 천장과 고풍스러운 서가들로 둘러싸인 거대한 열람실은 진정 뉴요커들의 긍지의 상징이었다. 서울대학교가 정든 동숭동을 떠나 관악캠퍼스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38년이 됐다. 그 사이 관악은 엄청나게 많은 외관상의 변화를 겪었다. 그 속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가운데 중앙도서관이 있다. 1975년 관악으로 이전했을 때 학생 수는 1만4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2012년에는 2만8천명을 넘어섰다. 도서관 소장 장서는 1974년에 1백10만권이었는데 현재는 4백60만권이나 된다. 도서관은 포화상태이며, 학생들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도서관은 캠퍼스 내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 돼버렸다.
우리 도서관은 작년 3월부터 신축을 위한 기금 조성을 시작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6억원이 조금 넘게 모금됐고, 1백87명의 동문들이 동참해 주었다. 이와 별도로 冠廷李鍾煥교육재단의 李鍾煥명예이사장님이 6백억원을 출연해서 제2도서관을 지어주시기로 약속했다. 평생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돈으로 국내 최대 장학재단을 운영하시는 분이 이제 서울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낡은 도서관 건물은 여전히 손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내년에 모습을 드러낼 신축 도서관 곁에서 너무 민망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중앙도서관 건물의 리모델링은 절대 필요하다.
동숭동에서건 관악에서건 늦은 밤 도서관 문을 나설 때의 그 밤 향기를 기억하는 모든 동문들에게 간곡히 청한다. 오늘의 당신을 있게 만든 모교의 도서관을 기억해 주십사고. 그리하여 자랑스런 후배들이 선배들의 꿈을 이어 더욱 찬란한 서울대학교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십사고. 1천8백명, 나아가 1만8천명의 서울대 동문들이 모금에 참여해 주신 최초의 1백87명의 고귀한 뜻을 이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