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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2013년 2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金芝河시인과 문리대




 金芝河시인을 만나 인터뷰해 동아일보 2개 면에 걸친 특집기사(1월 9일자)를 실었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그는 “서울대 미학과가 문리대에 편입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59학번이다. 본래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환쟁이는 가난하다'는 모친의 만류로 그림과 학문세계를 병행할 수 있는 미학과에 입학한다. 당시 미학과는 미술대학 소속이었으나 4·19가 터진 이듬해인 1961년 문리대로 편입된다.

 金시인이 미학과의 문리대 편입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 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문리대는 단순히 서울대 내 단과대학들 중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 중의 대학이었으며 한국 지성의 요람이었고 한국 지도층 양성소였으며 무엇보다 70년대 학생운동의 산실이었다.

 서울대 문리대는 쿠데타로 집권한 朴正熙정권에 치명타를 안긴 `6·3'(64년 6월 3일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절정에 이르자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을 이끌었다. 당시 주역 중 하나로 훗날 구속돼 끔찍한 린치와 고문을 당하고, 교수직에서도 해직됐던 현대사기록연구원 宋哲元이사장이 쓴 `아! 문리대'를 읽어보면 당시 문리대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헌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전율할 정도이다. 그들은 남들이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지만 말과 글, 생각에 재갈이 물린 민중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

 문리대는 광복 후 약 30년간 1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75년 2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해 3월 관악캠퍼스로 서울대가 옮겨가면서 인문-사회-자연과학대로 발전적 해체(?)를 했기 때문이다. 역사란 것은 때로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채 잊히는 것이 더 크고 많은 법이다. 서울대 문리대 역사도 너무 많은 부분이 잊히고 묻혔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이끌어온 서울대 역사야말로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지금은 유야무야됐지만 서울대 해체론은 지난 대선에까지도 공약으로 나왔다. 이런 인식들은 서울대가 산업화에 기여한 측면만 부각하고 민주화를 주도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데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대 민주화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방향모색은 지난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TV에서 나로호 발사 성공을 보았다. 미래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비상을 보았다.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대한민국의 비상을 위해 서울대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이뤄져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법인화도 이뤄진 만큼 서울대의 비상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