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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2012년 12월] 문화 꽁트

‘건축학 개론’의 추억




 금년에 상영한 한국 영화 중에 `건축학 개론'이라고 있다. 단기간에 관람객수 4백만을 넘었다니까 화제가 될 만도 하다. 제목만 보면 무슨 집짓는 기술을 배우는 내용인가 하겠지만, 추억 속에 숨겨둔 대학생 시절의 가슴 설레던 첫사랑 이야기이다.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꼭 헤어지고 마는 것일까. 미숙해서 그럴까. 아니면 사랑이란 그저 일장춘몽의 몽환인가.

 누구나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과 이루지 못한 회한을 평생 가슴 깊이 묻어놓고 살아간다. 첫사랑이 이뤄진다 해도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대체로 1990년대로 보이는데, 그보다 더 어설프고 가난했던 개발 독재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에게도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나 가슴 뭉클한 공감이 느껴진다.

 1969년에 입학한 우리는 동숭동의 대학본부 운동장에서 입학식만 하고 수업은 서울 변두리 공릉동의 배나무 과수원들로 둘러싸인 공과대학 캠퍼스 낡은 교실에서 시작했다. 의·약, 농·공, 예능, 사범대를 제외하고 법·상, 문리대 신입생들은 전공학과와는 무관하게 반별로 편성돼 이곳 오지에서 1년간 교양수업을 받도록 돼 있었다. 뿌리 깊은 반체제 학생운동의 선후배간 접속을 차단하기 위해 신입생들을 상급생 선배들로부터 격리 봉쇄하려는 정부의 계책이었다.

 공대의 황량한 캠퍼스 밖으로 걸어 나오면 뽀얗게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자갈길의 신작로가 있었다. 상계동과 서울역을 오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서너 대씩 다녔지만, 등하굣길의 교통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다행히 학교 정문 주변에 작은 촌락이 있어서 나 같은 지방출신들은 아예 이곳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이 외딴 마을에 밤이 오면 캠퍼스는 어둠에 싸이고 과수원은 교교한 적막강산이 됐다. 학생들은 시내로 과외지도 아르바이트를 나가거나 숙제를 하거나 이집 저집에 모여 앉아 웃고 떠들고 마시며 청춘의 고독을 달랬다.

 낯설은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갈 무렵 황량한 캠퍼스에도 노란 개나리와 빨간 진달래꽃이 하나 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봄을 타는지 미숙한 녀석들 일부는 애정결핍증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사춘기를 앓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남녀공학이 아닌 세대라 대학입학 이전에는 여학생을 교실에서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대학에 들어와 보니 다소곳한 선녀들과 한 교실에 앉아 수업 받는 것 자체가 황홀하고 가슴 뛰는 체험이었다. 여학생이 몇 명이라도 배정된 반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녀들의 아리따운 뒷모습을 보면서 수업을 듣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휴강이라도 되면 자태도 고운 그녀들은 교실 뒤뜰을 나란히 손잡고 거닐면서 달콤한 가곡을 합창하곤 했다. 우리 같은 총각들에게 그녀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우상이었다. 점차 짝사랑 신드롬이 퍼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무슨 과의 여학생 누구를 좋아하고 또 누구는 같은 반의 여학생 누구를 사모하고…. 일종의 유행병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여학생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홀로 사랑에 빠진 녀석들은 나름 심각한 상사병을 앓고 있었다. 처음 차를 타면 생기는 멀미 비슷한 증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저녁 통금 직전, 입학 후에 같은 과 친구로 새로 사귄 우석이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돼 거의 실신하다시피 내 하숙방에 찾아왔다. 손에는 도라지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있었다. 도수 높은 술도 따뜻한 위로의 말도 그에게는 별로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날 밤을 꼬박 눈물로 지새운 그 친구는 이튿날 아침에야 겨우 진정이 돼 안암동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내 친구 우석이를 절망에 빠뜨린 짝사랑 사건, 그 줄거리는 대체로 이렇다.

 우석이는 유복한 집안의 4형제 중 둘째로 자라 성품이 온유한 서울내기이다. 언행이 진실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다소 소심하고 말수가 적어 여간해서는 자기 감정표현을 하지 않아 나이에 비해 너무 점잖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러한 속 깊은 우석이가 언제부터인지 같은 반에 있는 불어불문학과의 봉연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상사병의 대표적인 증상이 상대방은 엄청나게 위대해 보이는 반면에 내 자신은 너무나 작게 느껴져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때문에 쉽게 비탄과 절망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만나도 말 한마디 못 붙이고 마음만 태우던 우석이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하기로 작심을 했다. 이대로는 속병이 될 것만 같아서 이판사판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의외로 결판의 날은 생각보다 빨리 오는 법이다.

 캠퍼스에 봉연을 닮은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4월 어느 날, 우석이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요일을 골라 미리 학교 앞 신작로 버스 정류장에 나가 봉연이를 기다렸다. 한낮이라 아직 하교하는 학생이 많지 않아 거사하기엔 매우 유리했다. 하늘이 우석의 애타는 마음을 아시고 돕는 것 같았다.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가 이내 도착했다. 학생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지어 차에 올랐다. 우석은 다소 긴장했지만 봉연의 뒤쪽에 조금 떨어져 모르는 척 태연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만원 버스는 한참을 달려 청량리 로터리에 이르자 승객은 반이 내렸다. 곧 이어서 신설동 로터리에 이르렀지만 평소 여기에서 버스를 갈아타던 우석이는 내리지 않았다. 오늘은 초지일관 꼭 결판을 내리라 다짐했다. 동대문을 지나 종로로 접어들자 버스에 서있는 승객은 몇 명 남지 않았다. 이 때 쯤에는 봉연이도 급우 한 녀석이 자기를 줄곧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종점이 서울역인 이 버스를 봉연이 끝까지 타고 가는 이유는 집이 청파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우석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결단의 시점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봉연이도 숨을 죽이고 상대방을 몰래 관측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버스는 이미 시청 앞을 지났고 남대문을 돌자 서울역이 점점 시야에 들어왔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타고 왔다.



 문득 우석은 봉연이가 집이 너무 멀어서 학교 다니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멋지게 하려면 맨 처음 뭐라고 말을 건넬까. 준비했던 단어들이 순서를 다투다가 그만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목구멍에 침이 마르면서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시계소리가 들렸다. 지금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한다. 용기를 내야 한다. 오늘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결심이 서자 우석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으며 뒤쪽에 있던 봉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색하고 수줍은 미소로 봉연을 향해 수작을 건네었다.

 “봉연씨는 … 집이… 머나요?”

 “········? “

 무슨 말이 나올지 잔뜩 긴장했던 봉연은 느닷없이 김빠지는 질문에 그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기나긴 신경전 끝에 겨우 이것이 질문이라니. 우석은 봉연의 실소에 그만 다음 건넬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봉연을 따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보였다. 이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됐다. 이렇게 쉽게 끝나다니. 더 살고 싶은 생각도 살아갈 희망도 날아가 버렸다. 삶의 의미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그는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집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서울역 광장에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정신이 아득했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모두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지나가던 행인 중에는 동전을 놓고 가는 착한 사람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날이 어두워지자 정신을 차려 친구라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외로운 영혼은 가엾게도 낮에 갔던 멀고먼 길을 되짚어 늦은 밤 나에게 찾아왔던 것이었다.

 우석은 그 사건 후로 사람이 변했다. 고개를 들고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과묵한 그가 더욱 말수가 줄어들어 마음의 상처가 심각했음을 짐작케 했다. 다소 허무주의적인 면을 보이던 그는 반체제 시위가 있을 때에는 학교 앞 자갈길 신작로에 선봉에 서서 누구보다도 치열한 투사로 변해갔다. 그것은 독재정권을 향한 민주화투쟁이라기보다는 `너무 먼 당신'을 향한 울부짖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공릉동에서 한 많은 신입생 교양과정을 마치고 2학년이 돼 동숭동으로 온 이후에야 우석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학년을 조용히 다니면서 뭔가를 은밀히 준비하는 듯 보이던 그는 졸업 후 방위근무를 마치자 미국으로 홀연히 떠났다. 떠날 때 나랑 뜨겁게 작별했지만 그 후 지금까지 그의 종적을 알지 못한다. 뜨거운 작별이 한국을 영원히 떠날 것임을 암시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글쎄, 짝사랑 사건이 그의 인생행로를 뒤바꾸어 놓은 것일까.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봉연은 우석을 배려했는지 대학 4년 동안 다른 누구와도 데이트 한 번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봉연으로서는 나름대로 근신하고 수절하는 예의로 우석의 순정과 마음의 상처에 말없이 보답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영화 포스터에 우석이의 고뇌하던 얼굴이 겹쳐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