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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호 2012년 11월] 문화 꽁트

꿈을 꾸나보다, 金 異 然(수학교육61 - 65)소설가






 고교 졸업 30주년 Home coming day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정은혜는 서준호를 만났다. 무작위로 테이블 번호를 뽑아 자리를 정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테이블 번호를 뽑아 옆자리에 앉게 됐다.

 아무래도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 몇 사람 건너서 어렴풋이 소식을 들어오긴 했지만 얼굴을 마주 보기는 30년 만에 처음이다.

 정은혜가 마흔 아홉살이니 서준호도 그쯤 됐을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라는 게 이래서 좋은가 보다. 서로의 늙음을 눈치챌 수 없다. 눈으로 눈을 보고 있으면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얼굴로만 보인다.

 물론 오랫동안 소식 모른 채 지냈던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기도 했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정은혜는 서준호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으로 참석했다. 서준호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제 나이 오십이 다 됐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바로 옆자리에 가까이 앉았다.

 “군복이 멋있네.”

 정은혜가 건넨 첫 인사였다. 그의 어깨 위에 반짝이는 별을 두려운 느낌으로 본다.

 “별 하나면 소장이라고 하나?”

 “아니, 준장이라고 하지. 별 한 개가 더 있어야 소장이지.”

 “장군이 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지? 별따기도 힘들었지만 닥터 정은 나보다 더 힘든 공부를 했는데 뭘.”

 남녀공학이 좋긴 좋은 것이다. 몇 반 안 되는 동창생들 중에서 별별 직업인이 다 나왔다. 그 중엔 장성, 성직자, 법관, 의사, 교수, 사업가, 술집 마담, 권투 선수, 탤런트, 가수, 택시기사, 박수무당도 있다.

 그들은 식사가 끝나가고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틈을 타서 자리를 떴다.

 지하에 있는 작은 카페로 내려갔다.

 “여름 방학에 농활 동아리에서 양평 어딘가에 가서 농사일을 돕던 생각나지?”

 서준호가 맥주 두 병을 주문해 놓고 불쑥 옛날 얘기를 꺼낸다.

 “거기가 양평이었어? 그냥 시골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서울서 별로 먼 곳이 아니었네. 역시 남자는 방향감각이 여자보다 좋은가 보다.”

 30년 전 시간으로 돌아간다. 십대 소년소녀로 돌아간다. 참 오래 전 일이다. 그리고 걱정 근심 없이 참 행복했던 시절이다.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온 시간이다.

 “그 때 돼지우리를 치우며 냄새 때문에 고생했던 생각나?”

 “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거야. 난 바보였나 봐.”

 “여학생들은 그런 험한 작업은 시키지 않았으니까 생각 안 나는 건 당연한 거지.”

 확실하게 십대로 돌아간다.

 장군이고 의사고 뭐고 오십이 다 된 나이조차 모두 던져버렸다.

 “닥터 정은 무슨 과 의사지?”

 “나?”

 “전문의를 땄을 거 아닌가?”

 “음, 소아정신과.”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정은혜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맥주잔을 다 비운다. 서준호는 비운 잔을 채워 준다. 정은혜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린다.

 “서장군은 아이가 몇이야?”

 “아들 하나.”

 엉뚱하게 아이가 몇이냐고 되물으면서 정은혜는 답하기를 피한다.

 “다들 건강하지? 난 딸이 하난데 자폐아야. 그래서….”

 정은혜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머리도 좋아 언제나 수석만 했었고 공부 잘하는 아이답지 않게 미인이고 성격도 활달했던 여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그냥 조용히 내 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야. 처음엔 비관하고 무엇엔가 원망하고 분노했는데 이젠 안 그래.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서준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은혜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그러곤 말없이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정은혜의 고통을 덜어주듯 따스한 느낌이 전해왔다.

 “이젠 괜찮아. 내 아이 대신 다른 아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이 내게는 큰 위로거든.”

 정은혜는 서준호의 따스한 손의 체온으로 편안해진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노곤하게 잠이 올 것 같다.

 지금까지 정은혜는 긴장하고 투쟁하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주위를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왔다. 누워서도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채로 잠을 잤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정은혜가 부러울 것 없이 가질 것 다 가진 여자로 살면서 도도하기 짝이 없어서 말도 붙이기 싫을 정도로 미워한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보내는 시기, 질투, 미움을 온 몸으로 견디며 남이 모르는 불행을 가슴에 숨기고 살아온 여자다.

 정은혜는 울컥 서러움이 밀고 올라와 철철 눈물이 쏟아진다. 오랫동안 눌러 온 슬픔이다.

 서준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준다.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았던 약점을 내보일 수 있는 친구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정은혜가 눈물을 보이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동정이나 위로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비밀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내일부터 아니 앞으로 영원히 서준호를 만날 일이 없다 해도 상관없다.

 서준호가 정은혜의 감춰 놓았던 비밀을 알았다 해서 어린 시절에 느꼈던 우정에 금이 갈 것도 아니고 인격적인 약점이 될 것도 아니다.

 조금씩 슬픔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찢어질듯이 조여오던 가슴의 통증도 가라앉는다. 마음이 아프면 실제로 가슴도 찢어질 것 같다는 걸 알았다.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사라졌을 때엔 고요한 평화 같은 게 온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 닥터 정 가족을 초대할게. 와이프가 음식 솜씨가 좋거든.”

 “폐가 되지 않는다면. 딸을 데리고 가도 되지?

 “물론이지. 닥터 정의 딸을 위해서 초대하는 건데.”

 몇 년 묵은 김치, 손때 묻은 악기, 낡은 속옷, 오래된 친구는 편안하고 맛있고 좋은 것이다.

 이제 가끔 자폐인 딸의 성장에 관해서 부끄럼 없이 보고할 사람이 생겼다. 자랑할 일도 몇 가지 될 테니까. 딸이 그린 그림이랑 피아노 실력도 보여주고 싶다.

 그렇지만 정은혜는 초대 받은 일에 대해 며칠 생각하다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저녁 초대를 사양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냥 그 전처럼 서로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기로 하고 50주년 Home coming day까지도 살아있다면 그 때 다시 만나기로 하자는 말을 남긴다.

 서준호는 정은혜의 심각한 목소리로 전하는 말을 다 듣고 나더니 한바탕 소리내어 웃는다.

 “난 기뻐. 아직도 닥터 정은 십대 소녀군. 사양한다는 말을 기다린 게 아니라 저녁 먹을 날짜가 어느 날이 좋은지만 알려주면 좋겠군. 그 날 내 가족도 보여줄 테니까. 서로 알고 지내면 좋잖아.”

 “고맙지만 내 딸은 아직 한번도 남의 집에 데려가 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겁이 나.”

 “안심해. 내가 다 도와줄게. 와 보면 알게 될 거야.”

 정은혜의 미적거리며 사양하는 말은 단호한 서준호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역시 군인답다는 느낌이다. 이미 정은혜의 사양의 말이 마음에도 없는 말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단칼에 끊어버렸다.

 서준호의 집 현관에 들어서기까지 준비하는 일이 며칠 걸렸다. 입고 갈 옷이나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가 더 어려웠다.

 서준호의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 날, 현관을 들어설 때 정은혜 가족은 모두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그들을 마중 나온 서준호의 아들은 휠체어를 타고 방 안쪽에서 굴러오고 있었다.

 그들이 충격으로 굳어져 있을 때 서준호는 휠체어에 타고 있는 아들에게 정은혜의 가족을 소개한다.

 “누가 오빠일까, 누나일까.”

 정은혜의 딸은 안고 있던 인형을 서준호의 아들에게 준다. 그들은 마주 웃는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서준호가 귓속말로 조용하게 말한다.

 “우리 어쩌면 사돈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거 멋진 생각이네.”

 집안에 가득 차 있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시장한 모든 사람들의 식욕을 돋운다.

 그가 말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안 가본 곳이 없는 여행 마니아다.

 여행의 조건은 돈과 시간 그리고 건강이라고.

 그건 여행뿐만 아니라 세상사는 데 어디든지 통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