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호 2004년 9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吳 應 瑞(47년 齒大專門部卒)치과원로학수회 회장
사상보다 우정이 앞선 월북동기들 6·25때 내려와 학생들 도와주기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우리 겨레에 큰 시련이 다가왔다.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져 38선이 생기고 그 양측에는 이념을 달리하는 좌우로 대립되어 원수가 된 미·소가 이 강토에 피로 물들이는 참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 국제 5개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발표되면서 5년간을 어떻게 기다리느냐고 전 국민이 반대하자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좌익이 갑자기 자세를 바꿔 절대 찬성으로 대립하게 됐다. 여기에 이용당한 계층이 바로 대학생들이었으니 미군정은 교육의 획일성을 도모하고 효율화를 위해 기존의 공립대학 전문학교를 묶어 단일 종합대학으로 만들기 위한 서울대학교 창립을 수행했다. 과연 서슬이 시퍼렇고 세계를 적화시키려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남한을 조속히 점거하려고 좌파학생들을 부추겨 활동을 강화했다. 여기서 필자가 몸담았던 치과대학을 중심으로 이 격동기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5명의 전학생, 특히 일제시절 반일투쟁 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서 석방된 閔丙翊·徐孝源·崔一根옹, 方寅植·金魯鉉동문 그리고 일본 진병을 기피하려고 위장 사망하여 숨어 있는 필자가 복교됐다. 그중 4명이 주동이 되어 서울대학교 설립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으니 이에 동조하는 좌익학생 郭甲植·金翔圭·徐洪錫·安炳祿·尹哲洙동문(이상 모두 월북) 등이 치대동창회의 朴扶榮·金文祚동문과 야합하여 사립대학으로 운영하겠다고 불을 붙였다. 당시 치과대학은 서울 중심지인 소공동에 위치해 있어 각 대학의 반대 학생들이 몰려왔다. 워낙 좌익바람이 세차 찬성파를 반동분자로 몰아붙여 언동을 삼가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미군정이라는 배경이 있으니 이 소용돌이 속에서도 미국에서 공부한 李有慶교수가 위험을 무릅쓰고 강경한 태도를 취해 그 가닥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는 같은 교실에서 친구간에도 찬반이 갈라지면 말도 안하고 서로 반목을 계속했다. 세월이 흐르자 신생 서울대학교는 문을 열었고 미국인 젊은 교수가 총장으로 임명됐다. 심하게 반대하던 학생들은 퇴학처분이 내려졌다. 이때를 전후하여 월북한 동기생수는 11명에 이른다. 그것으로 일단 물결이 잔잔해졌고 역사적인 서울대학교가 탄생된 것이다. 한편 월북했던 동기들 중 일부가 6·25전쟁 때 인민군의 군정요원으로 다시 서울로 입성했는데, 뜻밖에 우리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입장이 곤란한 학생들에게 방패가 되어 안전을 도모한 것은 괄목할만한 미담이다. 그리고 다시 북으로 도망가는 날, 눈물로 작별을 한 것은 사상보다는 우정이 앞섰으리라. 오늘날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하려면 최고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서울대학교에 편입된 것이 참으로 잘된 결과라고 자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