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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2004년 9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백제 개로왕의 비극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기는 일로 찬반여론이 비등하는 참에 그 민간추진위원장이 남북전쟁을 가상하여 서울을 포기할 수도 있는 듯한 발언을 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저런 일로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는 판국에 국방책임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발언이 나와 더욱 불안해진다. 그 발언이 아니더라도 신수도 후보지가 서울 남쪽이라는 데서 패배주의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1천5백년 전에도 서울에서 공주로 천도한 사실이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5백년의 한성시대 백제가 전성기를 이룩하고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면, 공주백제와 부여백제는 몰락의 시대였다. 서울을 포기한 개로왕 이전의 백제는 5백년간 삼국 가운데 최강의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또 중국 각지에 군현을 설치하고, 일본왕을 제후로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의 국보인 저 유명한 칠지도는 바로 근초고왕이 3백69년에 하사한 칼이다. 이왕 개로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삼국사기」에 실린 개로왕 21년, 서기 4백75년의 비극이 떠오른다. 고구려 장수왕이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 워커힐 뒷산인 아차산에 진을 치고 먼저 북쪽 王城을 7일만에 함락하고, 이어 개로왕이 있던 남쪽 왕성을 불태웠다. 당황한 개로왕은 성문을 탈출하다가 걸루 등에게 붙잡혀 아차산으로 끌려가서 참혹하게 죽었다. 걸루는 백제사람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자였다. 그런데, 개로왕의 비극은 사실은 장수왕의 뛰어난 심리전의 결과였다. 한성의 지세가 워낙 난공불락의 요새지여서 무력만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 장수왕은 내부붕괴를 유도하기 위해 스파이전을 폈다. 바둑이 뛰어난 승려 道琳을 첩자로 보내 개로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탕진하도록 권유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전 국민을 동원해 궁실, 누각, 성곽 등을 짓고, 큰돌을 캐다가 왕릉을 만들었다. 그 결과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다. 백제의 국력이 허물어진 것을 본 도림은 고구려로 도망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드디어 군대를 보내 쉽게 승리를 거뒀다. 장수왕의 출병소식을 들은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불러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어리석어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됐다 …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나 너는 난리를 피해 있다가 왕통을 이으라』 개로왕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백제는 천혜의 요새지인 한성에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의 저자 金富軾은 백제의 교활함과 내분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썼으나 19세기 실학자 茶山 丁若鏞은 달리 해석했다. 바로 최상의 도읍지인 한성을 버린 천도에서 백제멸망의 원인을 찾았다. 개로왕의 비극으로부터 1천5백년이 지난 20세기에 들어와 우리는 또다시 힘겹게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그런데 지금 개로왕처럼 어리석은 통치자도 없고, 장수왕 같은 영걸도, 도림 같은 첩자도, 걸루 같은 배신자도 없는 듯한데, 왜 스스로 문주왕 신세가 되려 하는가. 국민의 사기를 키워도 부족한 시기에 왜 백기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