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호 2012년 8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아버지는 손을 놓는 법이 없단다”

국회의원 故 諸廷坵동문을 워싱턴에서 만났을 때다. 오랜 반독재 투쟁을 벌여오다 제도 정치권으로 갓 진입한 그에게 내가 물었다. 기자로서 던진 의례적인 질문이었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의 고충이 뭐요?”
그가 깜짝 놀랄 대답을 했다.
“오매불망 타도의 대상이었던 그 독재자를 제가 닮아간다는 사실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다른 누가 뭐래도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법입니다. 국회의원이 된 후 내 무의식의 말과 행동 속에 그 독재자의 매너가 나타나는 걸요!”
식사 중에 나온 그의 말을 내가 십수 년 지난 지금까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함은 그의 언어가 지닌 담력 때문이다. 그 언어 속에 들어있는 靈性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언행에 깃든 독재자의 잔재를 감별해낼 만큼 그의 통찰력은 가히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워싱턴에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1년 후다. 그는 이번에는 별말을 남기지 않고 엉뚱하게 책 한 권만 덜렁 전하고 갔다. `신부와 벽돌공'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이었다. 밤새워 그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건 그가 한마디로 오싹할 정도의 독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책은 지방 명문고를 1등으로 졸업한 그가 5수 끝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던 66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로, 그 후 펼쳐진 `30년 한국'이 이 책의 배경이다.
재학시절 민청학련 사건 때 諸廷坵동문은 학우 李 哲에게 자신의 등록금을 `자금'으로 넘겨준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사형이 선고된 柳寅泰와 李 哲에게 그는 “너희들은 참 좋겠다”고 부러워할 정도로 독종이었다.
문제는 이 책의 주제 겸 주인공이었던 `독기'가 책의 중반부를 넘기면서부터 `손길'한테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는 점이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목동의 철거민촌에서, 때로는 넝마를 줍거나 벽돌공 노릇 중에, 그리고 (당시처럼) 국회 의석에서 그가 수시로 잡혔던 것이 손길, 사랑의 손길, 바로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고백으로 이 책은 끝난다.
책을 덮고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赤軍의 장군이 친동생 지바고의 외동딸을 찾아내 아비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탐문하는 장면이다. 조카딸은 아빠 손에 붙잡힌 채 전란 속을 헤매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훌쩍이며 말한다.
“아빠가 제 손을 놓았어요.” 그래서 결국 迷兒로 여기 저기 전전 끝에 발전소의 여직공이 돼 큰아버지를 만나게 됐노라고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한다. 그 말을 듣던 장군은 오랜 동안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네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손을 놓는 법이 없단다.”
사실이 그러했다. 어린것의 손을 놓았던 사내는 어머니를 겁탈 후 아내로 데리고 살던 외삼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섯 달 후면 우리는 싫든 좋든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이번만큼은 한 두 권쯤 저서를 낸 후보한테 표를 던지고 싶다. 이왕이면 故人처럼 독기와 영성으로 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지 않는 사랑의 `손길'로 쓴 저서 말이다. 그 주인공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