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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호 2012년 5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KAIST 劉 進교수






 유대인에게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면 한국인에겐 `스코필드 리스트'가 있다. 스코필드 명단에는 李三悅(철학59 - 63)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故 金槿泰(경제65 - 72)前민주통합당 상임고문·鄭雲燦(경제66 - 70)前국무총리·韓悳洙(경제67 - 71)한국무역협회장 등 발전된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인물들이 가득하다.

 우리나라를 계몽하고 3·1운동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린 유일한 외국인. 성실하고 정의로운 한국인의 잠재력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박사. 한국명 石虎弼인 그의 정신을 계승한 `호랑이 스코필드기념사업회'의 초대 회장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소재공학과 劉 進(금속공학68 - 72)교수를 만나 사업회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등학교 때 반 친구를 따라 스코필드 박사님이 가르치시는 영어 성경 공부를 배우러 갔었어요. 당시에는 외국인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다녔죠.”

 스코필드 박사는 세계적인 수의학자이자 선교사로 1916년 연희전문대에서 세균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었다. 1919년 3·1운동 직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李甲成씨로부터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되는 독립운동 현장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 독립운동을 해외 언론에 알리는 등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박사님은 4·15 제암리 사건 현장도 찍어서 일제의 잔혹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유관순 열사나 여윤희 씨 등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하셨어요.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지원하시면서 일제로부터 미움을 사 강제 추방당하셨죠. 그렇지만 `My heart is in Korea'라고 말하실 만큼 한국을 사랑하셨어요.”

 강제 추방 이후에도 스코필드 박사는 계속되는 기고문을 통해 해외 언론에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했다. 한편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가축의 출혈 원인을 규명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이 연구는 오늘날 사용되는 혈액응고 방지제 디쿠마롤(dicumarol)과 비타민 K로 발전됐다.

 “캐나다 대학에서 정년을 마치시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자 한국으로 돌아오셨어요. 저는 대학 초년생 때 여자친구도 없고 또 박사님도 홀로 외로워하실 것 같아 자주 찾아뵙곤 했죠. 고등학생 때와 달리 그 때는 박사님에게 인간적인 친밀함도 많이 느꼈었어요.”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와 모교 수의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고아를 보살피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박사에게 직접 배웠던 수많은 제자들, 모교 수의대 교수들과 박사의 유지를 계승하고자 한 인사들이 만든 사업회는 2003년 첫 모임을 갖고 2010년 사단법인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모교 수의대와 공동으로 추모장학기금을 조성하고 해마다 서거일(4월 12일)을 기념해 추모식과 장학금수여식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추모식에서는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서울대출판문화원刊)을 출간했다. 사업회는 이후에도 스코필드 박사 동상 설립, 스코필드 학생동아리 지원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서울대가 매번 수의대를 통해 행사를 적극 지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박사님의 한국 이야기인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책을 찾고 싶어요. 또 박사님 이야기가 교과서에 게재되도록 힘쓰고,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해 박사님의 `얼'을 기리고자 합니다.”




 외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지에 묻힌 박사의 묘비에는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세계적인 공학자로 스코필드 박사의 정신을 계승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劉 進교수의 모습에서 영원히 잠들지 않고 깨어 세상을 빛내게 할 한국의 정신을 엿보았다.

 “대한민국은 지금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마지막까지 한국인에게 `1919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선조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시대가 바뀌었지만 이러한 정신적 유산은 계승돼야 합니다. 그것이 박사님이 태어난 영국이나 가족이 있는 캐나다를 떠나 한국에 묻히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