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호 2012년 4월] 문화 꽁트
TV 三國기행, 崔 民 錫(대학원04 - 06)

기묘한 일이었다. 지친 몸으로 말 그대로 침대에 뻗어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손엔 TV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왜인진 모르겠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 전 TV로 사소한 정보 한 자락이라도 섭취해야겠다는 현대인의 강박관념인지, 아니면 TV시청이 곧 휴식이라는 생각의 발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호흡마저 버겁게 느껴지는 새벽 1시, 나는 미라처럼 누워 TV를 켰다. 눈은 이미 반쯤 감긴 상태였지만, 호흡기를 뗄 수 없는 환자처럼 퀭한 눈으로 모니터를 관망했다. 한쪽에서는 토론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경연 프로그램이, 다른 한쪽에서는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그 토론과 경연과 드라마 사이에는 간장게장과 영광굴비와 과메기가 먹음직스럽게 광고되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토론 프로그램에서 육박전에 가까운 설전을 벌이던 두 출연자가 똑같은 화면조정 색깔의 도복을 입고, 무협영화의 엑스트라처럼 합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쪽이 주장을 하면, 다른 한쪽이 비웃음을 선보였고, 그 비웃음에 발끈한 듯 다른 한쪽이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훈련감독처럼 보이는 자가 갑자기 타이머를 누르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둘은 익숙한 듯 악수를 했다. 한쪽이 손을 흔들며 “그래도 예전엔 이렇게 까진 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라고 말했고, 다른 한쪽은 “지금에 와서 콘셉트를 바꿀 수는 없잖아”라고 되받았다. 나는 그 광경을 어이없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래. 어떤가. 시사교양國에 온 느낌이 …. 둘이 합 맞추는 데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었어”하며 껄껄껄 웃는 그는 뭐랄까, 어릴 적 봤던 `환상특급'류의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해설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구겨지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빳빳하게 다려지지는 않은 양복, 정갈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으나 반질거리지는 않는 헤어스타일, 선글라스를 끼곤 있으나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 인상. 그는 자신을 `TV가이드'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내가 떨어진 곳이 바로 `TV월드'라 했다. 나는 그 황당한 설명에 기함을 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도복을 입고 합을 맞추고 있던 `나시민'과 `나여옥'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째 그 눈빛에는 `저자가 그자인가!'하는 일종의 확인, 그리움, 안타까움, 절망, 그 인식에 따른 회한, 체념 같은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 떨어졌으며, 저들은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TV가이드는 노회한 표정으로 “자, 자, 차차 설명해줄 테니 일단은 따라오게나. 기왕 TV월드에 왔으니, 일단 세 나라를 차근차근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해봄세”하며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갔다. 그때 감독으로 보이던 자가 다시 호루라기를 불었다. 언제 악수를 했냐는 듯이 나여옥은 나시민을 쏘아붙이기 시작했고, 나시민은 익숙한 듯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안경을 고쳐 쓰며 표독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쩐지 그 눈빛 한 구석엔 생계의 쓸쓸한 고단함 같은 것이 묻어나 보였다.
남자가 이끌고 간 곳은 예능國이었다. 그는 뭔가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이 손으로 선글라스를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야, 여기가 핵심이야. 요즘엔 여기서 모든 가치가 확산된다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를 멀뚱히 보았다.
“자네도 대충은 알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자유 경쟁이 보장돼 있어.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으면 노력하면 돼.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온 나라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지. 때론 투표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마침 애절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아이가 구석에서 “솔 음에 16분 음표의 애절한 운명적 비애를 담아낼 수 없다”며 울부짖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32비트의 흥겨움을 어떻게 하면 경망스럽지 않게 표현할 것인가 고민하며 머리를 찧고 있었다. 청춘들의 눈빛에는 오로지 `솔' 음과 `32비트'에 대한 고민만이 가득해 다른 문제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였다. “걱정 말게. 저 친구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멘토'들이 있으니까”라며 TV가이드는 유력 인사들을 소개했다.
“어. 이쪽은 올바른 부모들로 구성된 일종의 어버이 연대 `자유 연합 패어런츠 회', 아, 요즘엔 줄여서 `JYP'라고 하더군. 그리고 이쪽은 이 나라의 젊은 친구들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몸소 익히고 오신 선진 문화를 퍼트리고 계신 `양키 글로발 회', 역시 줄여서 `YG'라고 해. 마지막은 선두주자 역할을 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가치를 가장 먼저 도입하고 퍼뜨리신 분이시지. 예능國뿐만 아니라 TV월드가 실현하고자 하는 기본 가치를 이름에 담고 계신 분들이지. `신자유주의 만세 회', `SM'일세.”
세 모임의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네도 꿈이 있으면, 오디션 한 번 보게나”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일단, 살부터 좀 빼고 말이야….”(라고 말하는 JYP의 한 손엔 닭 가슴살 캔이 들려 있었다.) 그러자 웬일인지 TV가이드가 목소리를 무겁게 내리깔고 냉정히 거절했다.
“이 분은 다른 운명을 타고나신 분입니다.”
이 말이 무슨 사회적 약속이라도 되는 듯 세 모임의 대표는 일제히 놀란 표정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이때에도 역시 이들의 눈빛에는 `아니, 이자가 그자인가!'하는 현실 인식과 확인, 그에 따른 질시와 절망, 회한, 체념, 인생무상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알 수 없는 반응에 항변했지만 남자는 서둘러 발길을 돌릴 뿐이었다.
종착지는 드라마國이었다. 모든 가치는 이야기를 타고 퍼진다 했는가.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앞서 두 곳과 달랐다. 바람엔 달콤한 향기가 실려왔고, 거리마다 마음을 달뜨게 하는 음악이 흘러 나왔다. 고급 외제차들이 당연한 듯 거리를 미끄러져 지나갔고, 외제차의 뒷좌석 문이 열리면 항상 한 발이 나온 뒤 왜 그런지 꽤 시간이 지나야 다음 발이 나왔다. 거리에선 젊은 여자들이 남자만 보면 `실장님, 실장님'하고 외쳤고, 남자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고민거리를 간직하거나 세상에 굉장히 무관심해 보였다. 커피숍에 들어가니 귀부인으로 보이는 중년여성이 뭔가 말을 쏟아내며 돈 봉투를 `툭' 던졌고,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장맛비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럴 때면 빠지면 아쉽다는 듯이 `우리 아들을 포기해!'라는 대사가 들려왔다. 나는 어째서 이 나라는 거리의 풍경과 말들이 이토록 똑같을 수 있을까 의아했다. 그러자 TV가이드가 되레 놀라 반문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똑 같은데. 우린 입법까지 했네.”
그가 해준 설명은 놀라웠다. 이 나라에서는 일명 `엘리트 코스'라는 것이 있는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야 하고, 필연적 고생을 하다가 어느 날 알고 보니 자신을 길러준 부모와 낳아준 부모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한강 고수부지(의 정해진) 계단에서 소주를 입에 잔뜩 넣어 분무기처럼 내뿜은 뒤 (마치 의무 과정처럼) 어두운 밤길을 휘청거리며 걸어야 하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와중에 교통사고까지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통사고만 겪는다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바로 여기서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성공가도를 달릴 것이나 팔다리만 부러지면 그저 병원 신세만 지며 지지부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허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해서 기억을 되찾지 못하는 불안을 겪을 필요는 없는데, 그 이유는 드라마國의 기후와 환경 특성상 기억을 되찾게 해줄 자연적 요소, 예컨대 번개와 천둥, 낭떠러지에서의 추락, 아니면 교통사고나 괴한의 습격 등 인력에 의한 보조적 장치가 무수히 있으니, 달리 보면 이것도 다 광의의 사회보험제도에 속한다 했다. 나는 도대체 그런 것들이 왜 필요 하느냐고 또 항변했는데, 남자는 광장에서 연설을 하려면 당연히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는 게 아니냐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한쪽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평소 재연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던 남자가 울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해요. 태생적 조건이 계급으로 주어지는 이 사회가 싫어요.” 그 뜬금없는 호소에, 내가 그를 의아한 눈으로 보자,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도 당신처럼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단 말이에요! 이 (복 받은) 비운의 서자야!”
나는 충격에 휩싸여 TV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자네, 아까 두 나시민의 눈빛이 뭔가 남다르지 않았는가?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네”하고 무겁게 말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하며 뛰쳐나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한강변 고수부지에 앉아 입에 담은 소주를 분무기처럼 뿌리고 있었다. 그러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진 부품처럼 수동적으로 밤거리를 걸으며 고민에 빠졌고,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어디선가 돌연 등장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두 눈을 눈부시게 했다. 나는 그만 다리가 휘청거리고 말았다. 그 순간 둔탁한 무언가에 부딪히며 별이 추락하는 속도로 영혼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눈을 떴을 때 침대 시트는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한 손에는 리모컨이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무엇이 화면이고 실상인지 혼란스러웠다. TV모니터에선 오디션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애절하게 몸을 떨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다른 채널에서는 재연배우가 관습적인 연기를 하고 있었고,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나시민과 나여옥을 그대로 닮은 정치인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현실 속의 나여옥은 TV월드 속의 나여옥처럼 나시민을 차갑게 쏘아붙이고 있었고, 나시민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 눈빛이 뭔가 남다르지 않은가?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네.”
나는 혼란스러워 서둘러 TV를 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