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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호 2012년 3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우덕문화원 李 信 子원장





 지난해 12월 8일 대한민국예술원 역사상 최초로 여성 부회장이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우덕문화원 원장과 갤러리 우덕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李信子(응용미술50 - 55)동문이다.

 李동문은 우리나라 공예예술의 역사이자 현존하는 최고참 작가로 덕성여대 예술대 교수로 재직 당시 섬유예술을 대학교육과정에 보급시킨 미술계의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모교 미대동창회장으로 활동하며 동창회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한 李동문은 “예술원 회원으로만 있던 시절과 달리 부회장으로서 책임감과 사명을 갖게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1997년 李동문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을 당시만 해도 예술원에는 여성회원이 많지 않았다. 그 이후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 범위가 다양해지고 권위가 신장되면서 예술원도 여성회원이 늘어갔지만 현재 회장단 출범 전까지는 여성이 회장단이 되는 것은 금기시 돼 있었다.

 “그동안 예술원이 조금은 경직돼 있었죠. 金正鈺(불문51 - 56)회장님이 임기동안 함께 꾸려갈 러닝메이트로 저를 지목했을 때도 여성부회장을 지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어서 주변 사람들 모두 놀랐죠.”




 예술원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이 필요했던 시기에 섬유예술작가·명예교수·갤러리 대표로 미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두루두루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李동문이 부회장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지난번엔 일본과 교류전을 했는데 제 임기동안은 중국 예술원과 교류전을 개최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중국은 아시아에서 미술 시장 규모도 크고 상당히 매력 있는 작가들이 많아서 서로 의미 있는 작업이 이뤄질 거 같습니다.”

 덕성여대 교수로 32년 동안 후학양성과 작품활동에 힘쓰던 당시를 “쉴 틈 없었다”고 말한 李동문. 정년퇴임 후에도 미술계 현업에서 한국야구르트(대표 梁基洛)의 사회공헌 문화사업인 우덕문화원 원장을 맡아 갤러리의 전시·기획 등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퇴임 후면 다들 쉬면서 작품활동을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죠. 힘들 때도 있는데 갤러리 대표를 맡아 전시를 개최한 신진 작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미술계와 후배들 발전을 위해 좋은 전시를 기획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합니다.”

 李동문은 우덕문화원 갤러리에서 다양한 미술작가들의 발굴을 모토로 연 17회 이상, 15년 째 전시를 개최해 오고 있다. 다채로운 기획능력과 후학양성에 대한 열정으로 우리나라 미술의 반세기를 점령한 李동문은 `철의 여인'으로 통한다.




 李동문은 예술원뿐만 아니라 미대에서도 첫 여성 동창회장으로 다양한 동문교류전과 행사로 모교 발전과 후배들을 위해 힘썼다. 남편(故 張雲祥 회화46 - 51)과의 인연을 묻자 李동문은 팔순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과 포부를 밝혔던 모습과 달리 수줍게 1950년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림을 좋아하기도 하고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교 응용미술과에 지원을 해서 어렵게 합격을 했죠.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6·25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임시 캠퍼스에서 공부를 했는데 거기서 선배인 남편을 만났어요.”

 1982년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어렵게 1남3녀를 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李동문은 쉽지 않았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李동문은 미술계의 저변 확대와 작품활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일정은 많지만 작업실이 집에 있어서 밤을 지새워서라도 한 실 한 실 엮으며 작품을 탄생시키곤 해요. 우리 동문들도 각자 분야의 뉴크리에이터(New Creator)로 끈질기게 노력하며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발전시켰으면 좋겠어요.”

 李원장은 1974년 홍익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덕성여대 예술대 초대 학장, 한국디자이너협회 이사장, 한국섬유미술가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국전이 폐지되는 해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출품했으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교부 포상, 국민훈장,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 미술인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