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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호 2012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외교통상부 朴 泰 鎬통상교섭본부장





 -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 다녀오셨죠.

 “예전부터 가고 싶은 회의였는데 비싸서 못 갔었죠.(웃음) 하지만 전에는 학자로 회의를 세팅하는 일을 했었어요. 다보스포럼을 위한 `Global Agenda Council'이라고 해서 저는 무역 분야 의제를 담당했었죠. 회의도 하고 토론회도 갖고 전화 콘퍼런스 등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진 주제를 연구해서 올리면 다보스포럼에 속한 전문가들이 보고서를 만들고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죠.”

 - 미국 무역대표부 사람을 만나 쓴소리도 하셨다고 하는데.

 “다보스포럼에는 스위스 통상장관이 20개 국가 통상장관들을 초청하는 회의가 있어요. 거기서 미국 무역대표부 론 커크 대표를 만나서 미국 가전회사가 한국산 냉장고에 이어 세탁기에도 반덤핑 제소를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죠. 이 회의는 토론도 중요하지만 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적 네트워킹을 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지는 못하고 양자 통상장관 회의만 하다 바로 돌아왔습니다. 좀 아쉽네요.”

 - 스케줄이 빡빡하셨네요. 혹시 李明博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요.

 “특별한 인연보다도 李대통령께서 서울시장이실 때 제가 시정자문위원회 멤버였어요. 그래서 해외가실 때 조언도 해드리고 그랬었죠.”

 - 그렇게 교수님으로 잠깐씩 자문만 하실 때와 지금 본부장 자리는 어떠세요. 무게감이 다르실 것 같은데.

 “통상 분야는 미국 대학원 시절부터 계속 공부했죠. 그 다음에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로 있다가 1989년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정식은 아니지만 직접 활동을 했어요. 그때 계속되는 협상 때문에 비행기를 많이 타서 허리병도 나고 그랬어요.

 그 후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생기면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서울대에 국제대학원이 생겨서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경험이나 경력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까 지금 주어진 통상 분야는 익숙합니다. 제 전공이니까요. 그런데 이 통상교섭이 정치화되기도 하고 FTA(자유무역협정)와 관련해 국회도 자주 드나들면서 보고하고 정부와의 관계나 협상 이런 모든 것들이 이해관계로 너무 얽혀있으니 외부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부담감이 아주 많아요.”

 - 신문에 안 나오는 내용이 많죠.

 “저도 밖에서 볼 때는 비판하면서 정부 잘못이라고 그랬는데 막상 와서 보니까 통상 분야가 이론과 지식으로 알아도 현실적인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게감도 커지고 책임감도 강해지고…. 그나마 제가 학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문가로서 최선을 다해서 관련자들과 국민들에게 이 분야를 더 자세히 알려드리고, 대화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 최대 현안인 한·미 FTA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제 임기중 현안은 크게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지적하신 한·미 FTA 문제,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는 한·중 FTA, 기존 FTA 문제점들을 보안하는 것 등 이렇게 세 가지 정도를 숙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

 “한·중 FTA는 2005년부터 민간연구와 정부공동연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다각적인 논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미 EU와 미국 등과 FTA를 체결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협상을 개시할 시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중국측의 압박이나 요구도 심한 편입니다. 더 이상 모른체 할 수 없는 형편이 됐습니다.

 중국과 협약이 체결되면 많은 나라가 중국시장을 보고 일본보다 가능성이 큰 우리나라 시장에 투자를 하게 되기 때문에 한국은 자연스럽게 글로벌 허브국가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한·중 FTA 관련해 우려의 목소리가 큰데.

 “아직 민감한 품목들의 구체적인 협상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농수산품 같은 초민감 품목은 최대한 협상에서 제외시킬 계획입니다. 상품을 먼저 개방하고 서비스나 투자개방은 나중에 하자는 중국식의 단계적 협상도 없을 것입니다. 최대한 국민과 대화하고 다양한 전문가들과 정부 관료들을 만나서 충분한 의견을 들을 것입니다. 소통하는 한·중 FTA를 만들려고 노력 중입니다.”

 - 그렇다면 세 번째 과제인 기존 FTA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즉 북유럽에 속한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은 나라들이 우리나라와의 FTA와 관련해서 불만이 꽤 많아요. 예를 들면 우리도 EU와 같은 유럽 국가인데 `우리는 왜 치즈 관세가 25%나 되냐' 이러는 거죠. FTA도 형평성에 어긋나는 게 있어서 그것을 해결해갈 생각입니다. 국가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가 `글로벌 코리아'로서 FTA 후속 작업을 해야 하죠.”

 - 아직 한·미 FTA에 대한 거부감이 높은 게 사실인데 이에 대해 동문들에게 어떤 부분은 실질적으로 꼭 필요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설명해주신다면.

 “만일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과 FTA를 안 했는데 중국과 협상을 한다면 저도 반대입니다. 전략상 미국과 먼저 FTA를 맺은 것이 중요한 점은 미국이 세계 시장에서 가장 선진화되고 시장 규모가 큰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盧武鉉 前대통령이 한·미 FTA를 시작했을 당시 우리 교역이 미국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어요. 25%에서 10% 미만으로 하락세였거든요. 미국 시장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기가 힘들고 우리가 무역으로 먹고사는데 미국 사회에서 가져오는 첨단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자유무역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죠. 盧 前대통령이 이 부분을 잡아야 한다며 전략을 세워 미국과 협상을 시작하니까 오히려 유럽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협상은 미국과 먼저 했는데 한·EU FTA가 미국보다 더 빨리 체결됐어요. 선진국에서 보면 아시아 중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중요한 시장인데 미국과 한다니까 유럽에서 급하게 제안이 들어온 것이죠.

 이제 이런 전략상 중국과 FTA가 되면 중국의 넓은 시장을 바라보면서 기존에 협약을 체결한 선진국들이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투자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고용시장이 활성화돼 지금 청년실업 같은 문제가 해결되죠.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렇게 미국과 FTA를 먼저 한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탁월한 盧 前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취약하지만 잘만 활용하면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거래 후에 분명히 취약해서 손해가 가는 쪽이 있죠. 하지만 그 피해를 정부나 공공기관이 소득재분배를 통해서 도와주는 것이 무역이론이에요. 그 당시 적응하기 어려운 기업이나 산업은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 사실 1월에 22억 달러 무역적자가 나면서 우리도 일본처럼 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隔世之感이라고 할까요. 20년 전만 해도 일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일본 시장은 대지진 사건 이후 사회가 활력을 잃어서 활기찬 우리와 중국과 비교했을 때 왕따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우리도 일본처럼 되는 것이 아니냐, 혹은 대기업만 돈을 벌고 중소기업은 더 위축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한 우려는 매우 정당합니다. 지금 정부의 상생법, 유통법이 중소기업을 보호하려는 취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보호입니다. 일단 중소기업이 활성화되면 고용시장이 살아나기 때문에 그들이 정당하게 겨뤄서 이길 수 있는 공정한 룰과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대만에 있는 중소기업은 세계적으로 넘버 원이고 해당 업종에서는 그 회사 부품이 없으면 완제품을 아예 못만들 정도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참 많아요. 사람들은 완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로고가 붙어 있어서 알지만 그 속에 작은 부품을 만드는 회사까진 알지 못하잖아요. 완제품은 기술과 자본이 있으면 어느 기업이나 만들 수 있지만 그 안에 부품은 그 회사만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인지도는 낮지만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중소기업을 글로벌 서플라이어(Global Supplier)라고 부르는데 그런 회사를 많이 키워주는 환경이 필요한 것이죠.”





 - 그렇지만 우리나라 기업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학연·혈연 다 떠나서 검증된 기술력만 가지고 평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몇 천억원씩 기부하는 것보다 미래가 있는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한데 말이죠. 기부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을 키워주고 그들이 좋은 환경에서 첨단기술을 많이 개발하도록 지원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부분에서 한·미 FTA를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잘 활용해서 글로벌 서플라이어 수준의 기업이 많아지고 내실이 튼튼해졌으면 합니다.”

 - 막상 대기업과 거래해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협력업체들 위에 군림하고 쥐어짜고 그러죠. 재벌 2, 3세들이 창의적인 업종보다 손쉽게 가로채기식으로 돈 벌 수 있는 업종으로 진출하는 것도 큰 문제고요.

 “그래서 불공평하고 올바르지 않은 사회 현상이 많이 있죠. 우리 대기업이 규제가 많은 농업도 도와주고 산학협력 같은 R&D도 많이 해서 상생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 이상주의자(Idealist) 같으세요.(웃음) 본부장님 말씀처럼 그런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고용시장불안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강의하시는 것처럼 젊은 청년이나 후속 세대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요즘 대기업에 가면 처음에는 연수시켜주고 멋을 내서 회사 홍보만 하고 화려한 세상을 보게 하다가 막상 현장에 가서 실망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조직에 들어갔더니 심부름이나 시키고 목소리를 못 내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또 3∼4년 해야 한단 말이야? 이러면서 회사를 박차고 나옵니다. 요즘 애들은 못 견뎌요. 어른들은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하지만 그건 옛날 스타일이죠.

 이런 현상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일단은 사회가 젊은 사람들에게 `휴먼캐피탈'을 만들어줄 수 있는 직장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런 비전이 없으면 입사해도 금방 낙오되고 또 이들이 재취업이 안 되면 사회의 불만세력으로 남아서 문제가 됩니다.

 두 번째는 글로벌 시각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큰 은행이나 대기업만 고집해서 입사한다고 재수하고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외국이라도 직접 가서 인턴을 하든, 노동 일을 하든 몸으로 부딪혀서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 이거죠.”

 - 많이 보는 게 사실은 힘이거든요.

 “맞아요. 예전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꿈'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된 진보성향의 한 여성을 본 적이 있어요. 그분이 미혼인데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해외봉사를 갔어요.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교육하면서 한국에 대한 고마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돌아왔단 말이죠. 그 마음 자체가 얼마나 큰 스펙입니까? 다른 수치로 따지는 스펙보다 진취적으로 꿈을 갖고 직접 부딪혀 보는 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 요즘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문제인데 이 부분은 통상 분야에 있어서도 늪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잖아요.

 “우리나라는 심각하죠. 고령화가 빠르게 오는데 출산율도 제일 낮아서 고령자들을 서포트하고 지지하는 베이스가 점점 작아지잖아요. 그래서 고령화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저도 은퇴 후를 고민하면서 기부나 나눔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꼭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이나 마음으로 배운 지식을 나누는 삶에 대해서 생각했죠.”

 - 직장을 오래 못 다니니까 결국 직장을 다니면서도 교육비용을 많이 쓰고 자녀들에게도 들어가는 비용이 많고, 이 교육비에 대한 매물 비용으로 미래에 대한 투자를 못한 공포심이 커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적으로 보면 이제는 정규직으로 오래 일하는 게 불가능하죠. 아직 연금제도나 보장제도도 잘 안 돼 있죠. 하지만 사회보장제도나 금전적인 부분의 법규가 많이 바뀌면서 점점 더 나아질 겁니다.

 일반 사람들도 그렇지만 저도 나이가 있어도 건강하니까 개인적으로 은퇴 후에 제주도나 다른 나라,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와 같은 그런 곳에 가서 영어도 가르치고 제가 공부한 국제무역통상도 강의하면서 보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 좋은 생각이십니다. 키도 크시고 핸섬하셔서 젊은 시절 인기가 많으셨을 것 같은데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후배가 소개해줘서 만났습니다. 미국 유학 전에 만났는데 유학 가서 계속 편지를 보냈죠. 그땐 정말 매일같이 편지를 썼는데 집 사람이 아직도 그 편지뭉치를 간직하고 있어요. 그렇게 소개 반 펜팔 반으로 결혼을 했어요. 아내는 미국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지금은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국내 금융기관에 취직했다가 지금 창업을 하겠다고 밤 새워 일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길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20대에 도전해 보는 것은 바람직하다 싶어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 1970년대 중반에 유학을 가신 걸로 아는데 집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받으신 건가요.

 “동창회보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친이 산업은행에 계시다가 중역까지는 못 가시고 일찍 퇴임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KDI에 꼭 가고 싶었거든요. 넓은 연구실도 주고 비서도 있고 그렇게 좋아보이더라고요. 그 꿈을 위해서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죠. 다행히 TA(보조교사)로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집에서 도움은 거의 못 받았죠. TA 활동을 하면 돈을 주니까 가능했어요. 운이 좋았죠.”

 - 운이 좋은 이유는 본부장님이 그때그때 선택을 잘 하신 거죠.

 “운 하니까 생각이 나는 일화가 있는데 제가 서울대에서 李基俊(화학공학57 - 61)총장님 시절에 대외교류처장을 했어요. 당시 저는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보직교수를 맡는 게 부담스러웠죠.

 그런데 李基俊총장님이 학교 일을 몰라야 일할 수 있다면서 적극 추천해주셔서 열심히 했어요. 그 일이 서울대 외교관 같은 일인데 맡고 보니 정말 총장님 말씀대로 그 업무가 정말 재밌었죠.

 소위 李基俊총장님 팀이라고 할까, 당시 鄭正佶(행정61 - 65)대학원장, 柳佑益(지리67 - 71)교무처장, 朴吾銖(경영71 - 75)기획실장이 함께 했었는데 지금까지 만나곤 합니다. 우연히 그때 학교 행정 업무를 하면서 그분들 덕분에 국제대학원 건물도 짓고 교수도 많이 뽑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들께 감사패도 드렸었죠. 그리고 그때 林光洙회장님이 총동창회장이 되시면서 더 자주 모일 수 있게 행사나 모임도 많이 만드셨어요.”

 - 모교 교수님이시니까 서울대 법인화는 어떻게 보시나요.

 “법인화는 제가 국제대학원장을 할 때 李長茂총장님과 만나서 많이 논의했죠. 그래서 추진이 됐는데 그 법안이 국회에서 한 번의 토의도 없이 통과가 돼서 그 속에 숨어있던 이슈가 공론화되지 못한 부분들이 지금 문제가 된 것 같아요.

 개방하고 같은 맥락에서 보면 개방된 후나 법인화가 된 후에 좋은 점은 당장 눈에 안 보여요. 대신 손해보는 피해는 피부에 와 닿거든요. 공무원 신분을 박탈당한다든가, 등록금 문제, 기초학문에 피해가 간다 등 이런 부분들이 저도 그랬고 학교에서도 많이 논쟁이 돼서 검토를 한 내용이었거든요.”

 - 있는 것을 뺏기는 기분이 들죠.

 “현재 몸담고 있는 구성원들은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행정을 잘하시는 지금 吳然天총장님의 리더십이 더 돋보일 수 있죠. 조금 세월이 지나고 보면 한국교육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절차였다고 李長茂총장님이나 吳然天총장님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소화하시려면 건강이 필수인데 끝으로 동문들에게 건강비법을 소개해주신다면.

 “제가 성격이 좀 낙천적입니다. 고민은 많은 편이지만 안 좋은 기억은 잘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요.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공원도 산책하고 걷는 운동을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꿈도 못 꾸고 있죠. 잠시 다른 운동법을 찾아야겠죠.”

〈사진 = 玄智愛기자·정리 = 邊榮顯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