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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2012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金 正 鈺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 박물관 규모가 놀랍습니다.

 “여행 다니면서 하나 둘 수집한 겁니다. 이 공간은 韓水山·崔致林교수가 나중에 집을 짓겠다고 구입한 거였는데, 갑자기 외국으로 가면서 나한테 떠넘긴 거죠. 2003년에 집을 처분하고 박물관을 지었죠. 마당에 있는 `석인'들은 70년대 고속도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많이 나온 거예요. 당시 일본인들이 1∼2만원에 사 갖고가 3백만원에 팔더라고요. 우리의 귀중한 자산을 외국에 못 나가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사 모았어요.”

 - 관람객은 많은 편인가요.

 “지금은 겨울이라 휴관중이고 봄, 가을 주말에는 1백명 이상은 옵니다. 여전히 적자지만 매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어 희망적입니다. 예술가들의 얼굴을 후세에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곳이니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제가 알기론 얼굴을 테마로 한 곳은 여기밖에 없을 거예요.”

 - 그렇군요. 조금 늦었지만 35대 회장에 선출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주변 동료들의 권유도 있었고 기력이 남아있을 때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출마했지요. 예술원은 원로 예술인들을 예우하는 기능과 함께 젊은 예술인들과의 가교역할이 중요합니다. 원래 아카데미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죠. 그런 것을 활성화시키고 또 예술원 위상을 키워야 할 것 같아요. 예술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분들이 더러 있더라고요.”

 - 회장에 당선된 배경은 뭐라고 보세요.

 “선거 운이 따르는 것 같아요. 국제극예술협회(ITI) 회장에도 선출돼 7년간 맡은 적이 있죠. 이번 선거에 세 분이 나오셨는데 기대 이상으로 표가 나왔어요. 하나는 종합예술인 연극 연출을 하다보니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 예술원에 동문이 많죠.

 “그런 편이죠. 미술, 음악 분야에 서울대 출신이 많아요. 현재 회원들이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음대, 미대가 있는 대학이 서울대 외에는 없었죠. 이제부터는 타 대학 출신도 많아질 거라 봅니다. 그리고 사진작가가 현재의 조직상에서는 들어올 여지가 거의 없는데 영상예술 분야도 생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회원은 언제 되셨나요.

 “1991년이니 만 20년이 됐네요.”

 - 예순에 되신 거면 빠른 편이셨네요.

 “사실 그것보다 더 일찍 회원에 선출됐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대통령이 최종 결재를 했어요. 全斗煥 前대통령이 너무 젊다고 판단했는지 회원이 되지 못했죠. 예술원 회원이 꼭 나이가 많아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젊어서부터 자기 분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예술원이 할 일이라고 봐요.”

 - 예술원에는 늘 나가시나요.

 “일주일에 두 번 갑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 예술원, 학술원 공간을 궁전같은 걸 줘서 회원들을 위한 방도 마련해주면서 젊은 세대와 대화하는 공간이 되는 반면, 우리는 독자적인 건물도 없고 좀 그렇죠.”

 - 회장님의 역점사업으로 추진해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정부기구 이전으로 과천 청사에 남는 공간이 생기면 하나 얻었으면 좋겠네요.(웃음) 문화적인 의미에서 수도는 여전히 서울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과천 정도면 괜찮죠. 임기가 2년이라 이루기 힘들진 몰라도 그런 방향성은 확실히 잡아놓고 나가려고요.”

 - 요즘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우는 어떤 것 같나요.

 “과거 군사정권의 사람들은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니까 더 존중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지금은 뭔지 모르게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요. 소외당한 느낌이랄까. 복지를 말하는데 문화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복지는 실패하게 돼 있어요. 정치도 문화정치여야 하고요.”

 - 그럼요. 문화가 사회의 바탕이 돼야하겠죠.

 “문화의 반대는 원시가 아니라 야만이거든요. 우리가 많은 문명의 혜택을 보고 있지만 야만적인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런 점에서 위정자들이 문화를 좀 더 소중히 생각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 연극연출가로서 올해가 50주년이고 최근 1백번째 작품을 연출하셨어요.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닌데 이번에 숫자를 내세운 것은 나름대로 정리도 하고 반성도 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미가 컸어요. 50년간 연출에 몸담은 사람이 거의 없을 거예요.”

 - 대단하세요. 불문과를 졸업하고 바로 프랑스 유학을 가신거죠.

 “이데끄(IDDEHC)라는 영화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거기서는 물리, 수학도 가르치더라고요. 대학을 졸업한 제 입장에서는 안 맞는 부분이 있었죠. 한 학기 다니다 그만두고 소르본대학의 영화학연구소에 들어갔어요. 그 대학에서 현대 불문학도 배우고요.”





 -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세요.

 “吳尙源씨 소개로 柳致眞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연극과 인연을 맺게됐죠.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할 때 작품 `햄릿'의 조연출을 했습니다.”

 - 유학 다녀온 뒤 중앙대 교수로 부임하신거죠.

 “1959년 중앙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4년제 연극영화과가 생겼어요. 연극영화개론을 강의했죠. 그러면서 서울대 미학과에 연극영화론 강의도 나갔어요. 당시 수강생이 2∼3백명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요. 색다른 과목이다 보니 관심이 컸죠.”

 - 강의를 하면서 연극 연출도 병행하신거네요.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어요. 교수가 직접 연출 작업을 하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좋은 점도 있었어요. 해외도 많이 나가 요즘 같았으면 교수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민중극장 창립공연작인 `달걀'을 비롯해 순수창작극이었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 국제극예술협회(ITI) 회장을 7년 하셨다고요? 오래하셨네요.

 “회장되기 전 집행위원이 먼저 돼야 하는데 그 과정이 어려웠어요. 당시 한국이 사회주의 국가와 대치하고 있을 때라 공산국가의 표를 얻기가 불가능했죠. 그나마 `제3세계연극제'를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은 덕분에 간신히 한 표차로 집행위원이 됐죠. 그 후 소련이 몰락하고 제3세계 국가들의 지원에 힙 입어 세 번 연속 회장에 연임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이었죠.”

 - 마지막으로 새해 덕담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했는데 저는 좀 바꿔서 `노병이라고 해서 사라지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노병이라도 할 일이 있으면 끝까지 해야죠. 나이가 들었으니까 사라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거든요.”〈사진·정리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