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호 2012년 1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서울대 역사관을 세우자

모교 교수라는 위치는 자연히 대학과 동창회의 가교역할을 하게 한다. 자의반 타의반 그런 세월이 30년을 넘으니 나 자신이 하나의 역사적 증인이 된 느낌이다. 근년 동창회에서 개교원년을 1895년 법관양성소까지 소급해 재조정하려던 진지한 노력을 보면서 대학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느꼈다. 그와는 별도로 법대에 1992년에 설치한 `귀중문서실'을 2010년에 `법대역사관'으로 확대 발전시키기까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제 정년 1년을 앞두고 새삼 서울대 역사관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최근에 나는 春園 李光洙(1892∼1950)가 경성제대에 입학했다는 짤막한 언급이 있는 책을 읽었다. 지금까지 春園은 와세다대학에서 철학을 2년간 공부한 학력만 알려져 왔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것이라면 모교 교수로서 확인해볼 책임이 있다 생각됐다. 기록관의 원칙에 따라 유족의 동의를 얻어 학적부 열람을 신청하니 놀랍게도 경성제대의 학적부가 보존돼 있고, 1926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개교에 春園이 選科生으로 입학한 사실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재학번호 1번 李光洙'라고 선명히 적혀 있다.
그는 곧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35세의 나이에도 한국에 국립대학이 선다니 향학열에서 입학했던 것이다. 아마 같은 해 입학한 兪鎭午와 동숭동 캠퍼스에서 만나 토론도 했을 것이다. 영문학 교수가 알아보고 “당신은 조선 소설계의 태두인데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묻자 春園은 “와세다에서는 철학을 공부했지만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春園은 건강의 악화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2년 후 제적됐지만, 법적으로는 입학과 중퇴를 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학적부가 85년간 서울대 안에서 잠자고 있었고, 학계에도 까맣게 잊혀져 있었던 것이다.
春園의 예처럼 우리는 중요한 문서와 자료를 자체 안에 갖고 있는데 너무 무관심했다. 역사관이 대학의 얼굴이 돼야 한다. 일본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제는 중국의 대학들도 번듯번듯한 역사관을 만들어 방문자들을 사로잡는다.
역사관의 건물설립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학사의 서술은 상시로 계속돼야 한다. 50주년, 60주년 개교기념을 할 때만 임시로 편찬위원회를 둬 발간하고 해체해버리는 상습으로는 결코 좋은 역사를 쓸 수 없다. 일본에 있을 때 밤늦게까지 가장 불이 오래 켜진 방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대학사 편찬실이었다. 연구원을 둬 상설적으로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제의하고 싶다. 가능하면 서울대 역사관을 세워 국내외 방문자와 재학생들에게 서울대의 역사를 진실되게 보여줘야 한다. 대학과 동창회가 협력해나갈 가장 좋은 과제라고 생각한다. 동창회도 장학빌딩을 이뤘으니 이제 성숙한 모습으로 역사의식을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다. 지금의 기록관을 더욱 발전시켜 전시공간을 확보하고 대학사 편찬까지 담당하는 거교적 기구로 가꾸어 나가자.
나는 12년째 한국인물전기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여러 인물을 연구자들에게 발표를 시키고 있지만, 서울대를 거쳐간 학자들은 한국의 지성이며 엘리트들인데 너무 주목받지 못했다. 대학원동창회가 있는데, 금년 처음으로 회보를 `서울대 학문의 기초와 계승'이라 해 여섯 분야의 선구적 학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서술해 특집으로 만들었다. 이런 서울대 아카데미즘이 앞으로 역사관을 통해 일원화되면서 서울대 학문의 역사가 생생히 저장되고 전시돼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