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호 2011년 12월] 문화 꽁트
비만형 검투사 - 李 康 熏(산업디자인92 - 98)

“어때, 근사하지 않아?”
그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에페스(Efes) 고대 로마 유적지를 둘러보다가 원형경기장 객석에 앉아 쉬던 참이었다. 보통사람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큰 거구의 남자는 고대 검투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쇠와 동물가죽으로 만든 옷이며 신발, 등 뒤에 매고 있는 끝이 두 갈래로 나뉜 꽤 무거워 보이는 칼까지, 언뜻 봐도 무척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잘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검투사 복장을 하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살집이 많아서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요구하는 성가신 부류라고 단정지었다.
“음, 근사하긴 한데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네. 이런 원형경기장이라면 로마가 지배했던 곳 어디에나 있는 거잖아.”
실제로 그랬다. 여태껏 거쳐 온 지역들-서·남유럽과 지중해 일대, 북아프리카-은 대부분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었고, 어딜 가나 원형경기장이나 공중목욕탕, 모자이크타일 등이 남아 있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로마가 나의 다음 여정인 남미까지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던 것이 사뭇 고마울 정도였다.
“하긴 그렇긴 하겠지. 하지만 이곳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야. 잊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곳이지. 자네, 검투사들의 싸움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
농담이 심하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터키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할 거라고 많은 이들이 충고했지만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정보들은 대체로 상당히 유익하다.- 모로코에서 이미 단련이 될 대로 된 상태였다.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하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어섰다. 짧지 않은 여행으로 터득한 노하우, 대꾸를 하면 할수록 상황은 나빠진다.
“난 바로 이곳에서 죽었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물론 아주 오래 전 일이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림잡아 천 년은 지났을 걸. 이 칼로 목 아래를 찔렸어. 목에서 골까지 곧바로 쑤욱, 그 자리에서 즉사. 바보같이 칼을 빼앗겨버렸지 뭐야. 하하하.”
그는 목을 쓰다듬으며 쑥스러운 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의 두터운 목에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흔적이 정말로 남아 있었다. 목이 하도 두꺼워 웬만한 장사가 아니면 한 번에 쑤셔 넣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검투사라고 하기엔 좀 뚱뚱해 보이는데. 설마 죽고 나서 살이 찐 것은 아닐 테고.” “설마”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자네도 오해하고 있군. 검투사들은 대부분 나 같은 몸매를 하고 있었다고.” 에이, 정말로? 설마.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검투사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매끈한 근육질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남자처럼 굉장히 뚱뚱했는데, 지방층을 두텁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다는 것이다. 검투라는 것이 일단 경기장에 들어서면 죽이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공격도 치명적일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검투사도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치 않았다. 튼튼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싸울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가벼우면서도 안전한 갑옷은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규정상 일정부분 이상의 무장은 허용되지도 않았다.
중세 기사들의 결투가 과연 고대의 검투만큼 박진감이 넘쳤을까? 아무튼,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투사들은 `천연 갑옷'이 가장 성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돼지가 괜히 뱀의 천적이 된 것이 아니다. 독사의 치명적인 맹독이 돼지의 두터운 지방층을 통과하지 못하듯이, 검투사들의 두텁고 단단하게 단련된 지방층은 일격에 무릎을 꿇게 되는 불상사를 막아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래도 아킬레스건은 존재하는 법, 아니 실제로 아킬레스건이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다.
왜 그 시대에 샌들이 유행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무리 가죽으로 만들어 졌다하더라도 샌들은 역시 샌들이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을 지탱해야 했던 검투사들은 아킬레스건을 공격당하면 강력한 마취총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코끼리마냥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쿵 쓰러진다. 그 다음은 간단하다. 이 남자처럼 쓰러진 상대의 목 밑을 일격, 그것으로 끝이다. 목은 비교적 지방층이 얕은 부분이고 바로 골까지 연결돼 있어서 단번에 끝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죽는 자에게도 그 편이 나았다. 다른 선택의 여지란 더 이상 없으므로. 이밖에도 다양한 공격 전략이 있었지만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무기도 공격 전략에 따라 다양하게 개발됐다. 가령 그가 지니고 있는 끝이 둘로 갈라진 칼은 목을 찌를 때 목젖의 양쪽을 겨냥해 칼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물론 아킬레스건을 공략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무기도 있다. 낫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훨씬 길고 양날이 모두 서 있어 겉보기에도 무시무시하다. 길고 두꺼운 못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철퇴는 주로 머리를 부수기 위한 것이며 초승달 모양의 날을 달고 있는 창은 목이나 무릎이 타깃이다. 세상의 모든 무기들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상대에게 치명적일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서 방법을 찾으며 진화한다는 사실은 그 시대에도 유효했다.
이상이 그가 뚱뚱한 이유고 죽음에 이른 사연이다. 영화에서 보았던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동정심이 생긴 탓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렇게 죽어버렸지만 검투사는 정말 멋진 직업이야. 일부러 살을 찌우려고 밀이나 콩 같은 곡물들을 잔뜩 먹어대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지만 뭐 그만큼 근사한 대접을 받았으니까. 싸움에 이긴 날에는 발광하며 몰려드는 여자들 때문에 아주 귀찮아 죽을 정도였지. 큭큭큭.”
“가만, 검투사들은 노예신분이 아니었나? 영화에서 보면 상당히 비참한 생활을 하던데….”
“정말 후세 인간들의 상상력이란. 이봐, 우린 시민에 버금가는 신분이었다고. 물론 나 같은 외국인에겐 로마시민들과 똑같은 권리를 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어. 물론 경기에 이기면 상금도 두둑했고. 죽지 않기 위해선 매일 훈련을 게을리 하면 안 됐지만 먹고사는 게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 권력이 있다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자고 일어나면 암살 소식이었지. 그게 힘있는 녀석들의 생존방식이었어. 죽지 않으려면 먼저 죽여야 한다.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었지. 힘이 없는 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훔쳐야 하고 훔치기 위해서, 혹은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했어. 어쩌면 자네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결국엔 모든 것이 죽기 아니면 살아남기니까.”
그는 오래된 바게트 빵처럼 단단하게 부푼 배를 턱턱 치며 말했다. 둔탁하고 슬픈 소리가 났다. 너무 비관적이다. 비약도 심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말대로인 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일이다. 숨죽이고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채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로 인해 누군가가 고통 받고 있지 않다는 보장은 없다. 설사 당장에 그 누군가가 죽지 않더라도.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검투사로서의 그의 삶과 나의 삶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의 도태는 곧 죽음이라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나아가기보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쪽이 지금 우리들이 사는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을까.
검투사들은 죽지 않기 위해 살을 찌웠다면 우리들은 도태되는 것이 두려워 살을 뺀다. 건강을 위해서? 건강하지 못함도 도태의 조건이다. 어느 쪽을 이유로 정하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검투사들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다. 코를 높이고 턱을 깎고 지방을 빼내고 온갖 보형물들을 몸 속에 집어넣으며 매일의 전투에 임한다. 도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곧 경제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곧 생존의 문제와 바로 연결이 된다. 그의 말마따나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는 그리운 듯 말없이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여긴 자주 찾아오나?” 내가 물었다.
“종종.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것은 무척 오랜만이야.”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광이군. 그리고 고마워. 덕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
“그것 참 다행이군. 우리 검투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전해 줬으면 좋겠어. 멋진 일이었다고 자부하고 있거든.”
“약속하지. 어차피 믿는 것은 그들의 몫일 테지만. 참, 그런데 이름이 뭐지?”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그의 퇴장과 동시에 고양이 두 마리가 다가왔다.
“러셀 크로처럼 늘씬하게 잘 빠진 검투사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인가 봐.” 두 고양이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내 가방에 관심을 보였다.
“지금의 우리들이 원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란 이야기지.”
간식으로 준비한 과자를 나눠주자 두 고양이는 과자와 다투기라도 하듯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많이 먹고 살찌거라. 과자를 몽땅 먹어 치운 녀석들은 내게 먹을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누군가를 찾아 떠났다. 셀서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이미 정오의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아직 태양은 높이 떠 있었고 하늘은 무심한 듯 높고 새파랗기만 했다. 죽음이란 단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화창하고 기분 좋은 날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