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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 2011년 10월] 문화 꽁트

서울내기 명절나기




 설과 추석은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 없을 부동의 명절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아무리 길이 막히고,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도 꾸역꾸역 고향 갔다 오는 인구가 연인원 5천만명이나 된다. 왕복 개념으로 남한인구의 절반이 매년 두 차례 전국토를 뒤덮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분당 궁내동 톨게이트에 나가 있는 각 지상파TV 병아리 기자가 하이톤으로 질러대는 귀성 및 귀경 차량 행렬 리포트로 시작과 끝을 맺는 명절. 올 추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라디오와 온라인상으로도 각 도로의 교통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돼 우리 사회에서 귀성이 지니는 의미를 한껏 부풀렸다.

 문제는 그런 호들갑이 지방에 고향을 둔 이들에게나 적용되는 흥분의 단초이지, 나 같은 서울 토박이에겐 오히려 스트레스의 방아쇠일뿐이다. 고향 갈 걱정, 돌아올 걱정하지 않고 한산한 서울에서 며칠 있는 게 특권이지 무슨 스트레스냐고 반문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게다가 명절이 주는 역기능은 또 어떤가! 가뜩이나 지구온난화로 우리나라가 아열대로 변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판에다, 명절 연휴 발생하는 탄산가스는 무릇 幾何이며, 나오는 각종 쓰레기는 또 무릇 기하이뇨.

 추석과 설 연휴, 차례지내러 갔다 아예 조상과 가족 상봉하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되는 엄연한 현실. 여기에 명절이 지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명절증후군'은 명절이 주는 그림자를 되짚어보게 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명절 귀성이 주는 감흥은 예사롭지 않다. 오죽하면 우리 집 두 아들 놈 어릴 적 소원이 `명절 연휴 차 막히는 고속도로 갓길에 차 세워놓고 라면 끓여먹기'였을까.

 장남인 난 명절날 어머니를 필두로 동기간 모두를 우리 집으로 불러 개신교식 한가위 감사예배를 드린다. 그리곤 기껏 가족 윷놀이로 피자 사먹고 돗때기시장 같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게 소일거린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것도 못할 노릇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밋밋함이 아이들을 실망시켰을 수도 있겠다. 모친을 교외 요양시설로 모시고 난 재작년 가을 이후엔 各自圖生, 어머니를 찾는 걸로 명절을 때우고 있다.

 올 추석 연휴. 큰놈은 군에 있고 막내는 수능 공부한다고 코빼기도 보기 어려워 적막강산 신세가 된 난, 무미건조한 `서울내기 명절나기'를 탈피하고자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한참이나 굴렸다. 잘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다보니 뇌에서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다.

 추석 당일 낮 역사학자 全遇容(국사81 - 85)이 진행하는 교육방송(EBS)의 `기억 속의 역사, 기억 밖의 역사'를 소파에 누워보다가 문득 (내 딴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추석 연휴에 서울 속살보기'였다.

 뭔 얘긴지 감이 오지 않으면 일단 다음 얘기를 들어보시길. 번화한 친정 뒀던 덕(?)에 명절 어간엔 기름 냄새라도 풍기지 않으면 큰일나는 줄 알고 사서 몸 축내고, 침대에 쓰러져 있던 마누라를 깨워 무조건 차에 태웠다.

 처음 당도한 곳은 뚝섬유원지 `자벌레 공원'. 무슨 공원이름이 그러냐고 묻지 마시라! 시장직 걸고 엉뚱한 고집부리다 망신당한 아이가 공약으로 내세웠던 `디자인 서울'인가 뭔가 덕분에 건국대 앞 한강변에 세워진 배추벌레 모양의 거대한 축조물을 일컫는 이름이다. 잘 봐주면 배추벌레는 되겠는데, 자벌레는 무슨! 아무튼 그 벌레 속에 들어가 팥빙수 두 그릇 시켜 놓고 한강을 琓賞했다. 한국 사람보다 일본, 중국 관광객들이 더 많았다. 거의 상시로 하고 있는 듯한 한강 관련 전시회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오리배 한 번 타고 가자”는 철부지 마누라 겨우 설득해 다음 도착한 곳은 광진교 중간. 다리 옆 주차 공간에 차를 대고, 교각에 데크를 붙여 만든 `리버뷰 8번가'에 가니, 한 아마추어 작가의 한강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공간을 뺀 나머지 절반에선 레스토랑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애들이 음식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저녁 크로스오버 연주회를 보러올 사람들에게 제공할 음식 준비하고 있단다.

 광진교를 지나쳐 이번엔 천호대교 밑 편의점 부근에 도착했다. 내가 요즘 거의 매일 자전거 타고 둘러 봐서 잘 아는데(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상투어!), 거기선 저녁나절이면 색소폰 연주가 구성지게 울려퍼진다.

 무슨 동호회 선수들이 불어제끼는 연주다. `추석 당일까지 나와서 색소폰 불어대면 소는 누가 키우나, 소는'하고 비아냥을 들을 만도 하지만 그런대로 소리는 들어줄 만하다. 레퍼토리도 `보슬비 오는 거리'로부터 `마이웨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앉아 누가바 한 개씩 사서 물고, 캐러멜 팝콘을 연신 입에 넣으며 예의 색소폰 연주를 듣는다. 모처럼 마누라 얼굴에 “나 행복해” 하는 표정이 스친다.

 저녁은 미사리 `팔당 냉면'에서 때웠다. 추석답지 않게 외식하는 인간들 정말 많았다. 굵은 면발에 숯불 돼지삽겹살 얹어서 먹는 식인데, 어르신 주차요원 댓 명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손님 쇄도다. 가래여울 근처 집으로 돌아와 냉면 먹은 힘으로 의무방어전 한방 끝내니, 마누라 그대로 꿈나라로.

 밤 10시. 아, 가봐야 할 데가 있다. 공군장교 동기인 尹大泳(물리교육71 - 75), 과 동기인 韓龍述(화학교육71 - 75)한테 카카오톡(카톡)을 날린다. `별일 없으면 거천에서 보지.'

 5초 뒤 두 놈한테 약속이라도 한 듯 답신 온다. `콜!' `콜!'

 `전격 제트작전'의 마이클 롱이라도 된 양, 차 끌고 휘∼익 이화동 `거리의 천사' 사무실로 향한다. 10시 30분. 大泳이+와이프는 벌써 와 있고, 龍述이는 좀 있다 도착.

 을지로 3가∼을지로입구∼프레스센터, 盧素英(섬유공학80입)이 운영하는 아트센터 나비 앞과 종각역을 거치면서 연인원 2백여 명의 `거리 천사'들에게 심야 급식을 한다. 끼니 외에 제공되는 오늘의 특별 선물은 양말 한 켤레. 송편은 어제 나눠줬단다. 프레스센터 지하도에서 눈치 없는 천사 한 놈, 송편 안 준다고 투덜투덜. “송편 사 줄 테니 따라와”하며 붙잡으려니까 저만치 도망간다.

 손이 모자라 새벽 두시 넘어서야 겨우 급식이 끝났다. 섬김이들도 많은 수가 귀성을 한 까닭.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DJ와는 아무 상관없는 청계천 8가 `대중옥'엘 가서 약식 동창회를 한다. 난 서울식 추탕, 大泳이와 걔 와이프는 설렁탕, 龍述이는 해장국. 소주 한 잔씩 곁들인 밤참 끝내고 각자 귀가.

 다음날 오후. 고교 동창인 趙成大(전기공학73 - 77)한테 문자 때린다. `장충단 태극당에서 곰보빵으로 번개 때리자. 마눌님 모시고 나와!'

 이 치는 서울 시내 웬만한 행선은 도보로 해결하는 이상한 漢陽놈.

 나도 마누라 대동하고 5호선 지하철 탄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내려 태극당으로 향하는데, 비보 문자. `오늘 문 닫았음.'

 앰버서더호텔 맞은편, 關聖墓 앞에서 네 명이 만난다. 서울에 있는 관우 사당 3곳 중 하나인 그 곳에서 인증 샷 몇 장 누르고, 廣藏시장 노점 66호 `경태네'로 간다. 아바이순대와 떡볶이, 옆집에서 산 녹두전을 안주로 참이슬 몇 병 깐다. 마누라 둘은 보리차 놓고 오랜만이라며 자매처럼 재잘재잘 떠든다.

 불콰한 얼굴로 대학로 通을 거슬러 올라간다. 극단 학전 주인인 金敏基(회화69 - 78)가 다녔던 미대 자리엔 `홍익대 미대 동숭동 캠퍼스' 공사가 한창이다. 대학로 남쪽 입구에 `듣보잡' 간판. 도대체 학교는 뭐하고, 동창회는 뭐하는 거냐!

 成大와 둘이서 분기탱천 열을 내다가 의대 연건동 캠퍼스 거쳐, 학림다방에 기어올라간다. 옛날 분위기 내느라고 애쓴 흔적 역력하지만, 느낌은 별로다. 넷이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 마시고 있는데, 成大가 갑자기 일어서 나간다.

 잠시 후 표 넉 장 들고 나타난다. 문리대 운동장 자리에 터 잡은 하이퍼텍나다 극장표. 상영작은 `북촌방향'.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도 나왔던 金義城(경영84 - 90)이 조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감독 이름 가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洪尙秀답다. 재미 되게 없다는 얘기. 그래도 `강원도의 힘'보단 좀 낫다. 배경이 가회동 어간 북촌이라서 일 게다.

 술 다 깨서 전철타고 귀가했다. 집에 와 보니 뭔가 미진하다. 마누라 놓고 자전거 끌고 다시 나온다. 가래여울로 가서 서쪽을 향해 냅다 페달 밟는다. 명절이라고 별 거 없다. 한강변에 인간 참 많이 나와 있다.

 천호대교, 올림픽대교, 잠실철교, 잠실대교, 시크릿가든 지나, 7호선 철교 지나 영동대교,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잠수교 지나 플로팅 아일런드(이른바 `세빛 둥둥섬')에 닿는다. 대형 화면 달고 있는 맨 하류 섬 맞은 편 무대에 자전거 뉘어 놓고 앉아 있으니 대관령 음악제 녹화중계가 상영되고 있다. 줄리어드 선생하는 姜 孝(기악63입)가 몇 년 고생해서 만든 번듯한 음악제라서 그런지 콘텐츠가 괜찮다. 서울 거주자인지 관광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코쟁이 관람객이 꽤 많다.

 한 30분쯤 공연 보다가 반포로 나와 자전거 지하철에 싣고 귀가해 메일 체크하는데,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띈다. `Jay Chung'. 화성탐사선 `오퍼튜너티' 로봇팔 개발자인 우주공학자 鄭載勳(금속공학64 - 68)이다. `할렐루야, 즐거운 추석되시고 내년 설쯤 서울서 봅시다.'

 자려는데, 스마트 폰에서 `카톡'하고 소리가 난다. `형님, 집사람이 아파서 못 뵀습니다. 지난주 잠실 7080 저녁 시간 너무 좋았고요.' 발신자는 아우 尹在鎬(기계공학74 - 78)였다. 창문너머로 비치는 휘영청 보름달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