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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 2011년 10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오래된 친구



 며칠 전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가 식탁에 놓인 재미있는 글귀를 보았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12가지 종류의 친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선배처럼 믿고 따를 수 있는 친구, 연애감정이 안 생기는 속 깊은 이성 친구, 분위기를 바꿔줄 수 있는 모던한 친구,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여행하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친구, 좋은 추억을 공유한 오래된 친구….'

 이 글을 읽다가 문득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가까워졌는데 추석 무렵에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려 몇 달 정도만 함께 했던 친구다.

 친구 관계는 우연으로 맺어질 때가 많다고 한다. 대학 신입생 때는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기 때문에 1년 뒤 친구 관계를 조사하면 우연히 앞자리와 뒷자리에 앉아 공부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 친구와도 앞뒤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다가 우연한 기회에 관심사가 같다는 것을 알게 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클래식에 심취했던 시절이라 음악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가정교사해서 번 돈으로 종로, 동대문 음반 가게를 뒤져 갖고 싶었던 LP 레코드판을 발견하고는 함께 가벼운 행복에 떨었던 기억, 용돈을 쪼개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공연을 보고 장충동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기억, 명동의 클래식 음악감상실 필하모니에서 브루흐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을 들었던 기억들이 또렷하다.

 그때는 좋은지 몰랐던 바로크시대의 바흐, 비발디 첼로협주곡에 요즘 마음이 가는 것은 왜일까. `음악도 나이를 먹는다'고 했는데 아마도 가는 세월에 마음이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도 나처럼 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과거는 경험했던 몇몇 결정적인 장면이나 상황에 현재의 느낌을 덧칠한 것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감에 과거와 지나간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깊은 우정은 사랑보다도, 결혼보다도 오래 간다고 한다.

 건강과 경제력도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함께 행복하게 나이를 먹어갈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절실하게 든다. 鄭浩承시인은 `봄길'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노래했다.

 오랜 친구가 이 가을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젊은 시절 순수했던 추억을 많이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늦은 시간 아들 내외가 유학을 가며 선물한 바로크음악 CD를 들으며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또 새로운 시간을 기다려본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여전히 마음 속에 남는 것은 좋은 친구와 함께 했던 좋은 추억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