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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호 2011년 9월] 문화 꽁트

타임캡슐 속으로, 趙 英 雄(수의학63 - 67)



 지난 6월 25일 오전 J박사는 거실에서 모처럼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소위를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을 접하게 된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처음부터 끝까지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그도 `나를 따르라!'는 모토를 가진 보병학교의 초급장교 기초군사훈련과정을 학훈단 5기 출신장교로 이수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학훈단(학도군사훈련단)으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방영된 내용인즉 보병장교로 임관한 제49기 학군단(학생군사교육단, ROTC) 출신 초급장교들의 기초군사훈련 과정을 공영방송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세상 참 좋아졌다. 군사훈련 과정을 낱낱이 그것도 영상으로 전국민에게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 시청하는 시대에 방영을 하다니. J박사는 잠시 40∼50년 전 묻어뒀던 타임캡슐 속으로 여행하기로 한다.

 J는 E여대 대학교회에 주일마다 參禮하는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고등학교 시절 내내 주일이면 교회에 참례해 교목이신 H목사님의 철학적인 설교말씀을 귀에 담았다. S대학에 입학하는 영광도 있었고, 3, 4학년생 시절에는 학훈단생으로 교복에 교모까지 착용해야 하는 절도 있는 대학생이 됐다.

 J소위는 정복을 착용하고 장교기초군사훈련과정을 받기 위해 용산역에서 특별히 마련된 군용열차에 탑승한다. 물론 더불백이라고 부르는 부대자루에 관물을 담아 메고서 말이다. 그런데 체육대학 출신 장교들이 떼지어 다니면서 난동에 가까운 행패를 부리며 세를 과시하는데 꼴불견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냐고 속으로 분개하고 있는데 S대 출신 장교들이 타고 있는 열차 칸으로 몰려와서는 노려보면서 시비를 건다. 문리대 출신의 명물인 O소위에게 가서 반말로 시비를 걸었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 배포가 항우 같고 후보생시절 야영훈련 때마다 우리에게 넉넉한 웃음을 선사하던 그가 아닌가?

 조그만 소위가 시비를 걸고 덩치 큰 소위가 해결하는 단순한 주먹놀이다. 성질 급한 덩치가 큰 소위가 O소위를 향해 헤딩으로 공격을 했다. O소위는 날쌔게 피하면서 열차가 떠나가리만치 호탕하게 큰 소리로 “야, 이놈들아. 비겁하게 떼로 덤비냐!”고 소리쳤다. 이미 박치기했던 소위는 열차선반을 들이받고 “어구구”하면서 머리를 감싸 쥐고 아픔을 참느라고 쩔쩔맨다. 한편 S대 출신 소위들도 열을 받아 잠자코만 있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공부만 잘하고 얌전하니까 깔보고 섣불리 대했다가 혼줄이 난 게 아마 통했는지 더 이상의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다. O소위야말로 孟子님의 말씀 중 富貴不能淫(돈과 권력을 가졌으면서 음탕하지 않은 사람), 貧賤不能移(가난하면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威武不能屈(폭력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 사람), 此之謂大丈夫(어떤 사람을 대장부라 할까)라는 고사에서 위무불능굴의 본을 보였던 것이다.

 J소위는 보병학교가 있던 전남 광주시 외곽 송정리의 상무대에서 16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특히 야간 교육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서 유념해야 할 과제의 하나였다. 군에서는 금기시 하는 이동주보 또는 이동PX도 당시에는 볼 수 있었다. 훈련을 받을 때 많이 듣는 말이 있다. “피교육자는 춥고 배고프다.” 이 말은 어느 교육에서도 통하는 진리다.

 유격훈련은 적지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교육과제이다. 유격 및 체력단련교관은 K대 학훈단 출신 선배들이 여러 명이 있었다. 군에서도 전문가들을 영입해 과학적인 체력단련을 시작한 것이었다.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지상 11미터에서의 수직낙하훈련이야말로 사생결단의 용기 있는 도전이기도 하다. “애인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이게 무슨 선문답이람…. “낙하!” “00번 올빼미 낙하!” 풍덩. 우리들은 무사히 16주의 훈련을 마치고 개선장군처럼 용기백배했고 전방부대에 배치됐다.

 J소대장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있는 대암OP초소장으로 명을 받게 된다. 동기생 K소위가 지키던 초소였다. 나중에 그는 대대를 대표하는 캡(CAP)소대장이 돼 사단장배 각 대대 대항 소대완전무장 구보경연대회에서 우승해 ROTC장교의 위상을 높인 주인공이다. 당시 사단장 직속의 막강한 수색중대에서 출전한 소대가 우승후보로 확실시되던 때였다. 대우하며 구성원들의 신원과 출신도 출중했기 때문이다. 결과로 말하자면 최강팀을 녹다운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요즘 말하는 관심사병으로 구성된 말 잘 듣지 않는 골치 덩어리들의 문제사나이들을 이끌고 말이다.

 J소위는 초소장으로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고 아침 점호 때마다 군가 `진짜 사나이'를 소대원들과 힘차게 불렀다. 雲海를 내려다보면서 부르는 `진짜 사나이'에 그들은 점차 진짜 사나이가 돼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말에 `말이 씨 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루는 상급부대인 대대에서 연락이 왔다. 그 시절에는 미국무성으로 불렀던 현재의 미국무부에서 지원하는 비무장지대의 생태 학술조사단이 곧 도착하니 경호와 학술조사에 적극 협력 하라는 내용이었다.

 J소위는 진짜 사나이들을 모아 놓고 간단 명료하게 임무를 지시한다. 배치완료 보고를 받자 학술조사단 일행이 도착한다. J소위는 목청을 높혀 “충성!”을 외친 후 대암OP초소장 J소위라고 인사를 하고 분대장급 지휘자들을 인사시킨다. 상대방에서도 역시 소개가 있었다.

 와우! 생물학계의 거목이신 S대의 姜永善박사, E여대의 李永魯교수, K대의 유명하신 조류학자 元炳旿교수와 조교 尹茂夫선생 등이 도착한 것이었다. 간소하게 준비한 음료를 마시며 J소위는 자신이 S대 출신이라며 전공을 소개한다. 유명한 학자들을 도와 드리는 와중에 학술조사는 성공리에 끝났다. 우리나라에만 서식한다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산꿩을 미끼새를 통해 포획했고, 대암 큰 용늪에서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금강초롱을 발견하는 등 약 1천3백 미터의 고지에 있는 신비한 생물상이 밝혀지게 된다. 지금은 람사르협약에 따른 대한민국의 제1호 생태보호지역이 `대암 큰 용늪'이란 것을 상당수의 국민이 알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한·미 합작으로 신비가 밝혀진 것이 씨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방에서 바라보면 공산권의 세 지도자들의 이름을 딴 고지가 보인다. 스탈린고지, 모택동고지 그리고 김일성고지가 그것이다. 혹독한 추위에 고생하던 J소위는 이듬해인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전선인가 뭔가 하는 곳의 金新朝소위 등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겪는다.

 전방에서는 즉각 데프콘(방위준비태세, DEFCON) 2단계로 응전 태세에 들어갔고, 사단사령부에서는 Y사단장님 앞에서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모여 죽음을 불사하고 용감하게 나라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하면서 국민주인 진로소주를 단숨에 마셨다고 한다. 진짜 사나이들이 따로 없다.

 비장한 결의를 하고 귀대한 J중령은 대대의 중상사급 이상 초급간부들을 즉각 소집해 의연한 자세로 막걸리를 내 놓았다. “우리들 모두 국가 위기상황에서 조국을 위해 한 목숨을 바치자!” “넷!” 비감한 마음에 우리 모두는 입술과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은 동면 팔랑리 주민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소값이 폭락하는 등 피난준비를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탱크가 정위치로 이동하는 굉음과 포차가 진지로 이동해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도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J소위는 대대의 첨병소대인 8중대 2소대를 지휘해 적의 스탈린고지를 점령하고 차후 명령을 대기하라!”는 명령을 당시에 불가피하게 받았고 필히 수행해야 할 지상 과제였다. 그 당시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은 이유는 잘 몰랐지만 아마 전쟁이 났었다면 오늘의 J박사는 존재가 불투명할 것이다. 북에서는 프에블로(Pueblo) 정보수집함을 나포했고 한국해군함정 56함을 격침시키기도 해 극한적으로 대립했다고 볼 수 있던 때였다.

 어느 일요일 J소위는 당직사령으로 대대본부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칼빈소총 소리가 탕탕 들려온다. 창 밖을 내다보니 며칠 전 관심병사로 J소위와 상담을 했던 K일병이었다. K일병은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졸업하고 집안에서의 냉대를 피할 겸 자원입대한 앳된 19살의 사내였다.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차에 사고를 저질러 군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전방으로 재배치돼 온 일행 중의 한 병사였다.

 면접이랄까 상담이랄까 군부대는 인사장교가 담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시 ROTC출신 장교들은 병사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받던 시절이었으나 J소위도 다를 바 없는 ROTCIAN이었다. J소위는 동생과 같은 K일병에게 `나도 서울에서 자랐으니, 자신을 형으로 생각하고 애로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상의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도 동생으로 여기겠노라'고 얘기를 나눈 바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총구를 하늘에 대고 총을 쏘면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사무실에는 본부 중대 H중사와 기간 병사들과 보안부대에서 나와 있던 R상병들이 있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4발 정도를 쏜 것 같은데, 성질 급한 놈이 음식점에서 돈 먼저 낸다고 작업모에 비무장상태로 나간다. 한편 “야, 영일아! 너 왜이래 무슨 일 있었어?” “야! 임마!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올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이냐!” 등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K일병에게 다가간다. 다행히 총알이 다 발사된 모양인가 보다. 철거덕 소리가 난다. 다가가서 K병사를 잡고서는 “K상병!”하고 J소위는 자기의 전령을 불렀다. “이 녀석을 내 BOQ(독신 장교 숙소)에 갔다 재워라! 술 마신 모양이다. 실시!” 그리고는 상황이 종료됐다. 사나이가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 의리다. K일병은 그 후 CAP소대에서 한 명이라도 낙오하면 안 되는 소대 대항 경연대회에 참가해 `진짜 강한 사나이'가 됐다.

 J박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信義不殆라는 것의 좋은 결실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타임캡슐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