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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호 2004년 1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전쟁으로 10년 후배들과 졸업한 동문 많아

임시 하숙집 얻어 20여 명씩 함께 공부하기도 崔鍾起(54년 法大卒)한국국제관계연구소 이사장
 동숭동 법대 캠퍼스에 입학한 것은 1949년 9월이었다. 입학생 2백30명은 두 반으로 나뉘어 강의를 들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을 익히기도 전에 민족의 비극인 6ㆍ25사변을 맞게 됐다. 당시 학도호국단의 간부급들은 미아리고개에서 인민군의 총성을 들으면서 나무총을 들고 모교를 지켜야 한다는 상급생의 엄포에 며칠 밤을 새웠으나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우리들은 나무총을 버린 채 모두들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일부는 군에 입대하고 일부는 이북으로 끌려가고 남으로 피난을 간 학우 등 뿔뿔이 헤어져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는 친구들이 허다하다. 피난 임시 수도 부산 대신동에는 판자로 지은 법대 가건물이 세워지고 1951년 후반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전방에 있던 학우들은 군복차림으로 복학을 하고 학기말 시험에나 학교에 와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험기간에는 대신동에 임시 하숙집을 얻어 전방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20~30명씩 하숙집에 와서 노트를 돌려가며 시험공부를 하느라 떠들썩했다. 하숙집 주인은 2층 집이 무너진다고 성화였고 우린 주인어른을 달래는데 진땀을 빼곤 했다. 학교 교무당국에서도 복학생에 대해서는 최대한 시험과목을 추가로 치를 수 있도록 해줘 무척 고마워했던 기억이 난다.  피난 중이었던 53년, 정부가 서울에 환도하게돼 법대도 동숭동 캠퍼스로 옮기어 졸업을 적기에 한 학생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입학당시 2백30명이었으나 적기에 졸업을 한 학우(법대 7회)는 얼마 되지 않았고 1년에서 많게는 10년 뒤에 후배들과 졸업한 학우들도 많았다.  필자가 1969년 법대 총동창회 사무처장으로 있을 때 임원회의에서 동창회 명부에 입학연도를 기입할 것을 건의해 그 후부터 동창회 명부에 입학연도(1949년, 단기 4282년)를 병기, 입학연도가 서울대학 전체에도 명기토록 확대됐다. 현재 입학동기모임 명칭을 단기 4282년을 기억하기 위해 82동기회로 호칭하고 있고 후배들도 단기의 끝 두 자로 부르고 있다.  1999년 50주년 행사당시 주소확인이 된 동문이 96명, 외국거주 8명, 행방미상 72명, 별세 54명으로 나타났다.(82동기회는 이날 홈커밍을 기념하기 위해 모교에 1천만원을 기증했다) 지난해 11월 20일 동기회 모임에는 25명이 자리를 함께 해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때 생존확인 90명, 외국거주 5명, 행방미상 68명, 별세 67명으로 최종 확인됐다.  법대 82동기회는 6․25사변이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모두들 불행한 역경을 겪으면서 대학생활다운 낭만을 모른 채 세월을 보냈고 지금도 동기의 얼굴과 이름이 가물거린다. 추억의 사진을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봤으나 그것도 허사였다.  민족의 비극을 우리들은 몸소 체험했고 대학생활다운 추억도 간직하지 못한 불행이 다시는 후배들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가 지도자들은 자각과 반성을 하여 조국의 통일이라는 과업을 빚으로 후세에게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