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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 2011년 4월] 문화 꽁트

시간은 매정한데… 金異然(수학교육61 - 65)



 이렇게 문이 느닷없이 닫힐 줄 몰랐다. 요즘 우리가 늘 사용하는 문도 닫힘 조절장치가 달려있어서 사람이 통과하고 한참 있다가야 완전히 닫히곤 한다. 그래서 코앞에서 닫히는 문에 이마를 부딪칠 염려도, 옷자락이 문에 낄 염려도 없다.

 신경래 사장이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며 아내의 살가운 인사를 받는다. 면세점에서 사다준 고가의 선물도 유효했겠지만 열흘 만에 듬뿍 준 사랑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아내의 아침 키스다.

 신경래 사장은 차 안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연신 싱글벙글이다.

 사장실로 올라가 오랜만에 낯익은 책상에 마주 앉는다. 그때 회장의 직통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지 않아도 곧 회장 방으로 올라가 출장보고를 할 참이었다.

 혼비백산한 신경래 사장은 지체 없이 회장 방으로 달려간다.

 “수고했네. 신 사장. 좀 앉게.”

 “예. 먼저 출장 다녀온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하지. 지금 신 사장을 보자고 한 건”

 회장은 그 말 뒤에 한참 말 없음으로 긴 여백을 만들었다.

 점점 분위기가 굳어져간다. 신 사장은 조금씩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한다.

 긴박한 조임을 예감한다.

 “바로 지금 해야 할 말인 것 같네. 그동안 신 사장이 우리 회사를 정말 잘 경영해왔네. 신 사장이 우리 회사에 입사한지 몇 년이 됐지?”

 “금년으로 25년이 됩니다.”

 “신 사장 인생의 삼분의 일이군. 이제 회사도 자네를 놓아주어야 할 것 아닌가.”

 53세, 스물여덟에 입사해 25년이 지났다. 그동안의 많은 열정 노력 실수 고통을 한 상자 안에 쓸어 담으면 28세 입사 25년 근무, 그리고 퇴직 이렇게 단 석 줄로 쓴다.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쉰세 살의 낡은 장년이 되었다. 초로로 넘어가는 초입에 섰다.

 퇴출의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하는 절차가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회장도 신 사장도 더 이상 마주 앉아있을 삶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

 신 사장은 천천히 일어나 회장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고마움도 서운함도 막막함도 깊이 수그린 등으로 표현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회장은 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서 있었고 신 사장의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장실로 돌아온 신 사장은 아무 지시도 하지 않고 오후 세시까지 사장실에 머물렀다. 책상 서랍 속의 개인 물건을 정리하고 버릴 것은 버릴 것대로 한 쪽에 몰아놓고 마음의 정리를 하느라 책상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닫힘 조절장치가 없는 문이 느닷없이 신사장의 코앞에서 쾅 닫힌 셈이다.

 회사 근처에 있는 헬스클럽에 가서 가볍게 한 시간 걷고 사우나에서 피곤을 좀 풀고 휴게실에 앉아 냉수 한잔을 마신다.

 어디 가서 한잔하고 집에 갈까 하다가 그만 아내한테 전화를 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밖에서 저녁을 먹자는 말에 아내는 아이처럼 튕겨 오르는 목소리로 기뻐한다. 그 전에도 이런 전화를 자주 했더라면 한 여자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까.

 k대 앞에 있는 곱창구이 집으로 갔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선배들이 축하파티를 해주었던 집이다. 바로 그날 거기서 아내를 만났다.

 “당신이 이 집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장인어른이 곱창을 좋아해서 여기를 자주 온다고 했잖아? 그날도 당신은 아버지하고 소주를 마시러 왔다고 했지.”

 “그러던 장인이 이젠 세상에 안계시네요.”

 “시간은 매정한 거야.”

 곱창과 양을 반반 주문한다.

 소주를 주문하려는데 아내가 핸드백 안에 넣어온 작은 버번 병을 꺼낸다.

 “어제 당신이 가져온 옷가방 안에 들어있었어요. 늘 비행기에서 얻어오곤 했잖아요?”

 “나 오늘 소주로 하고 싶은데 당신은 어때?”

 “좋아요.”

 소주잔을 맞부딪치며 아내가 갑자기 정색을 한다.

 “오늘 참 이상하네요. 당신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예요? 이 곱창 집을 다 기억하다니요.”

이 쉰세 살이라는데.”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말고 얼른 말하세요. 답답해 죽겠어요. 설마 이혼하자는 말은 아니겠죠? 혹시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신 사장은 소주잔을 내려놓고 아내의 손을 두 손으로 잡는다.

 “나, 오늘 회사에서 쫓겨났어.”

 아내는 한동안 말을 못하고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한다. 차라리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말하는 게 나았다. 절망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어도 절망이었겠지만 어느 것이 더 큰 절망이었을까.

 “견디기 어렵겠지만 몇 달 있으면 마음이 진정될 거예요. 평생 동안 직장 없이 사는 남자들도 있고 사장도 못 되보고 평생 보통 월급쟁이로 사는 남자들도 많잖아요? 당신은 얼마나 멋지게 살아왔는데요. 고마워요.”

 쉰세 살이나 된 남자가 아이처럼 소주에 취해 엉엉 운다. 평생 열정을 바쳐 일한 회사에서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돌아보며 벼랑 아래로 던져진 느낌이었을 거다.

 신 사장은 몇 달 동안 거리를 헤매고 아이처럼 아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지냈다. 이제부터 살아내야 할 30년이 눈앞을 캄캄하게 가로막았다.

 아무 닫힘 조절장치도 없이 문이 닫힐 수 있는지 몰랐다.

 운전기사가 데리러 오면 그 차로 회사에 갔고 말만하면 가고 싶은 데로 모셔다주는 생활을 십여 년 하다보니까 운전도 서툴러서 다닐 수 없었다.

 아내가 드라이브를 하자고 한다.

 난생 처음으로 아내의 선산이 있는 시골을 찾아간다. 지명도 산세도 다 낯설다. 그렇지만 서울보다 편안하다. 답답하지 않아서 좋다.

 높은 산길 포켓 에리어에 차를 멈추고 한숨 쉬자고 한다. 아늑한 시골동네를 내려다보면서 아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다.

 “저 땅에 가서 농원을 하면 어때요? 아버지가 물려준 땅인데 한 5천 평돼요. 우리 집을 팔면 농원이 자리 잡을 때까지 한 삼사년 버틸 수 있어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귀농이구만.”

 땅이란 힘을 주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 그 땅을 보는 순간 갑자기 힘이 솟고 희망이 생기는 걸 느꼈다.

 “당신도 이젠 도시나 일을 떠나서 쉴 때가 되었어요. 욕망이 남아있겠지만 그걸 접는 것도 아름다운거래요.”

 “당신은 어디서 그런 멋진 말을 찾아서 감춰두었어?”

 야생화를 심고 개를 키우고 땅 주변에 왕 대추나무를 심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도시 태생인 신 사장은 농사에 관심이 없었지만 무엇이든 파고드는 성격이어서 반년 동안에 귀농 공부를 마치고 아내의 선산을 물려받아 가꾸기로 했다.

 처음 회사에 입사해 일하던 열정으로 일에 매달렸다. 일 년 동안 땅을 고르고 땅에 비료를 주고 교과서대로 작업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햇빛에 그르고 바람에 시달려 촌사람이 다 됐다. 손발은 심하게 거칠어지고 외출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밤마다 허리의 통증에 팔다리가 쑤셔서 서로 주물러 주기에 바빴다.

 눈만 뜨면 땅을 파고 개밥 주고 봄이 돼서 야생화 묘목을 심고 내년 봄엔 왕대추나무를 심기로 했다. 묘목이 한 그루에 2만원인데 4년만 지나면 한 그루에서 20만원의 수익이 날 거라는 설명을 곧이곧대로 듣는다.

 어느새 신 사장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밭을 돌보는 농부가 되었고 아내는 농부의 아내로 허름한 작업바지에 챙 넓은 모자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종일 밭에서 지냈다.

 서로 다정한 말을 나눌 시간도 없다. 밥도 대충 김치에 물 말아먹고 차는커녕 숭늉 마실 여유도 없다. 전에 쓰던 영국 도자기들은 박스에 넣어둔 채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땐 짝이 맞지 않는 머그잔에 되는 대로 봉지커피를 타 마신다.

 잠을 잘 때엔 서로 돌아누워서 코를 골며 잔다. 건강한 잠이라지만 이건 사는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느 날 옆집 남자가 땅 문서를 가지고 찾아왔다. 이 땅에 붙은 땅을 마저 사라는 얘기다.

 “살까?”

 신 사장이 아내한테 묻는다.

 “그 땅이 몇 평이래요?”

 “글쎄?”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더 살 거죠?”

 “글쎄?”

 신 사장은 아내의 거친 손을 꼭 잡는다. 시간은 매정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