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호 2011년 4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미리 가 본 천국

스위스 제네바에 주재했던 한국 외교관과 공무원, 국제기구 파견 직원들 사이에는 지금도 회자되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얼마 전 유럽지역의 공관장으로 부임한 대사 부부를 위한 환송모임에서도 화제로 떠올랐다.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지 벌써 8년째가 되는데도 이처럼 중독성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을 더듬어봤다.
거창하게 서두를 꺼냈지만 제네바에서 함께 생활했던 지인들이 공유하는 비밀이란 사실 별개 아니다. `스위스(제네바)는 재미없는 천국, 한국(서울)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물론 두 나라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삶의 질과 내용이 `냉소적'으로 대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외국에서 연수 또는 유학했거나 장기 체류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재미있는 지옥'에 담긴 뉘앙스를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서울만큼 삶이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도시는 흔치 않다는 것이 외국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반면 스위스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재미없는 천국'이란 표현이 다소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융프라우와 체르마트 등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스위스 시계와 치즈를 기념품으로 구입한 경험이 있는 관광객들에게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스위스의 자연과 풍광은 가히 지상의 낙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어느 화사한 봄날 국제연맹의 전신인 유럽유엔본부 기자실에서 바라본 몽블랑의 자태는 천국이 따로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삶과 관광은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국민소득과 살인적인 물가, 집 구하는데 한두 달은 보통인 주택난, 복잡하고 난해한 행정 및 사회체제 등으로 인해 현지 생활에 정착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비용을 감내해야 한다. 오죽하면 외교관과 주재원 가족들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제네바 생활은 건전하다 못해 금욕적인 수준에 가깝다.
그렇지만 밤문화와 오락거리가 없고 밤 10시면 주택가의 불이 꺼지는 등 생활여건이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을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이방인들이 살기에 부적합하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천국'은 분명한 듯한데 한국인에게는 무료하고 따분할 정도로 재미를 찾을만한 구석이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왕에 `천국'에 왔으니 `지옥'의 생활습관에 연연하지 말고 자연을 벗삼아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반어법적인 조언인 셈이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미국에서 복음주의 계열의 유명 목사가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책을 발간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종교적 논쟁을 떠나 일본의 대지진 참화와 원전 사태를 지켜보면서 현세의 `천국과 지옥'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삶이 `재미있는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날은 언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