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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2004년 7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한국 정치사를 웅변하는 「JP의 초상」

 새 천년을 목전에 둔 1999년. 金大中대통령 시절, 金鍾泌국무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수행기자들이 파리의 유서 깊은 한 음식점을 찾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동양 기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던 주인은 놀라워했다. 『아직까지 (JP가) 총리로 있습니까』 70년대초 朴正熙정권 시절 金鍾泌국무총리가 찾은 음식점일 줄이야. 딱히 주인에게 그때와 지금 한국의 국무총리가 같은 사람이지만 30년을 계속해온 것은 아니라는 저간을 설명하기, 기자들은 난감했다.  1996년. 아프리카 상아해안의 코트디브와르라는 나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수도 아비장은 아프리카의 파리로 꼽히는 곳이다. 바다를 끼고 열대풍의 프랑스풍 아비장 호텔에 JP가 머물렀다는 기념석이 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60년대 말 일명 「자의반 타의반」 외유 때 JP가 그곳에 머문 적이 있음을, 귀국하고 나서 알았다.
 JP. 숱한 수식이 붙는다. JP라는 이름은 1960년 이후 한국정치사의 굴곡, 고비 마디에 자리했다. 공과의 평가를 떠나 현대정치사에서 JP를 지우면, 제대로 읽혀질 수 있을까. 朴正熙정권시절은 물론 80년대 이후 엊그제까지 JP는 주인공은 아니었어도 무시 못할, 무시할 수 없는 조연이었다.  10년 가까이 정치부, 정당팀 기자로 일하면서 JP는 시들지 않는 기사 대상이었다. 1994년 새내기 정치부 기자로 여의도 민자당사를 출입했다. 당대표실 주인은 JP.  3당 합당을 통해 金泳三대통령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JP에게 주어진 2인자 명패였다. 즈음에 집권 중반기로 접어드는 YS계는 JP를 밀어내려 했고, 결국 밀어냈다.  1995년, JP는 몇몇 충청권 의원들을 데리고 「초라하게」 탈당했다. 당시 실세 姜三載사무총장은 『JP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1년후 15대 총선에서 JP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자민련은 충청권을 독식하고 TK에서 1당 지위에 올랐다. 남은 YS정권의 명운은 JP에게 주어졌다.  1997년 대선. 한나라당 李會昌후보측에서 JP와 가까운 사람들이 나섰다. 협상도 끝냈다. 李후보가 화룡점정만 찍으면 됐다. 하지만 李후보는 손을 내밀기를 거절했다. 그 공간을 DJ쪽에서 파고들었다. DJ는 심야에 청구동 JP집을 찾아가 DJP연합을 이뤄냈다. 정계은퇴를 번복한 굴레, 영남권과 보수층의 공고한 비토, 불가능할 것 같던 DJ집권의 길이 트였다.  DJ집권과 함께 JP는 절반의 권력을 향유했다. 이름하여 공동정부. 1961년 중앙정보부장 때 못지 않은 「JP의 힘」으로 칭해졌다.  2000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JP는 다시 집권세력에게 「짐」으로 다가왔다. 『지더라도 서산을 붉게 물들이겠다』는 JP. 결과는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확보 실패, JP는 가는 듯했다. 하지만, 집권당은 의원을 자민련에 이적시켜 교섭단체를 만들어주는 희대의 「의원 꿔주기」 소극까지 벌이며 JP에 매달렸다.  이렇게, 정치부 기자 시절 내내 JP는 「상식적(?)」 관측을 배반했다. 해서, 언제부턴가 (정치부 기자라고) 주변에서 JP를 물으면 「불가사의」라는 레토릭이 먼저 나왔다.  그 JP가 4월 19일(택일이 절묘하다) 정계를 은퇴했다. 헌정사상 첫 10선 고지에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자민련 의석은 4석에 그쳤다. 그래도 은퇴는 안하고 2선 후퇴쯤 아닐까. 일각의 관측을 배반(?)하고 『43년간 정계에 몸을 담았고 이제 완전 연소돼 재가 되었다』는 명언(?)을 남기고 총총히 정계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정치자금 문제로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조사도, 기소되기도 「처음」이라는, 해설이 낯설었다.  17대 국회 의원회관 221호 문패는 JP에서 장애인인 열린우리당 張香淑의원으로 바뀌었다. 총선 결과를 놓고 정치혁명, 주도세력 교체, 세대혁명 등의 다각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17대 총선이 만들어낸 정치적 변화를 가장 선명한 컷으로 웅변하는 것이, 십년차 정치부 기자에게는, 「JP의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