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호 2004년 7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서울대학교에 큰 박수를 …
서울대학교가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실체가 불분명한 소수세력들이 일부 방송에 편승하여 서울대를 흔들어대고 있다. 마치 조금씩 흠집을 내서 크게 여론화하여 큰 상처를 만들어 가는 상투적 수법이다.
서울대가 유일한 국립대학교이던 건국 초기부터 국가 전체 체계에서 서울대 출신들의 지도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크다 보니, 그에 대한 반발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겉보기의 지도력은 건국 이후 애국지사와 정치군인과 민주화투사의 전유물이었다.
건전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옳은 자세이다. 문제는 비판의 건전성 여부이며, 비판의 요체는 주로 서울대의 수월성(적절한 말이 없어서 쓴다)에 관련된다.
서울대 입학생의 상대적 수월성은 유일한 국립대학교이던 시절부터 태생적이었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건국 초기부터 학문, 문화, 교육, 보건, 산업, 경제, 정치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공적을 남겨온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망국론을 주장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서울대 탓으로 보이겠지만, 서울대가 우리 나라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이가 47.9%이고, 부정적인 이가 35.1%라는 여론조사도 있다. 서울대를 흔드는 이들의 주장은 학벌의 폐해와 입시의 폐단 두 가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해결책으로 언필칭 평준화가 주장되는데, 원하는 국민에게 똑같은 국립대학 졸업장을 주자는 것 같다. 이는 고등교육의 본질과 이상에서 크게 일탈된 것이며, 이미 혁명정부 시절인 1961년에 시행착오를 겪은 학사자격고시와 같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 예견된다. 그들이 흔히 예로 드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도 그 실상은 기계적인 평준화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수월성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임을 알아야 한다. 소위 학벌의 폐해는 서울대에 관한 한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수월성이 있는 집단의 특성상 개인적 성취에 집착하고 조직적 집단적 양태를 띠지 않는 것이 사실이며, 서울대학교가 전통을 달리하는 12개 전문 고등교육기관의 연립대학 체제로 시작된 것도 다른 대학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수월성의 추구는 모든 국가와 모든 대학의 목표이고,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강력한 국제경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 한 방법은 자유 경쟁에 의한 우수한 대학생의 확보와 그들에게 수월성 있는 교육을 꾸준히 시켜나가는 데 있다. 많은 나라들이 적절한 대학입시 제도를 택하고 그 제도를 장기간 지켜나가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왜 그러하지 못하는가? 부와 권력의 분배는 이상이 될 수 있어도, 수월성은 분배나 평준화의 대상은 아니다. 수월성은 끊임없는 노력의 목표이며,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이지 쟁취되어야 할 결과는 아니다. 최고의 수월성이 노벨상 수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극히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국민은 서울대학교의 허상에 집착하고 실상을 잘 모르고 있다. 서울대가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 예산을 독식하며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사사로운 얘기이나, 서울대에 입학한지 50년째, 가르치기 시작한지도 42년째,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학원소요, 기초생계비에도 크게 못 미치는 월급, 다섯 여섯 과목의 과중한 강의, 여름 무더위, 겨울 강추위, 텅 빈 창고 같은 연구실, 수없는 불면의 밤, 아무 보상도 없이 36년간 계속한 세미나, 그런 세미나 후 늦은 저녁 제자들과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싸구려 막걸리의 맛… 그러면서도 꿈을 키웠고 서울대를 키웠다. 지금도 서울대는 결코 「좋은 학교」가 아니다. 서울대는 이 지구촌 구석에 있는 약간의 상대적 수월성을 지닌 학교일 뿐, 5천년을 살아왔고 영원히 살아나가야 할 민족이 자랑할 만한 절대적 수월성을 지닌 세계적인 대학은 아니다. 실제로 서울대가 연구다운 결과를 제대로 내기 시작한 것은 겨우 지난 십년 내외의 일이다. 이 어린 나무를 잘 가꾸어야만 큰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대학 하나만이라도 민족의 자산으로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선도적인 대학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난 50여 년간 서울대를 힘들게 키워온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제야말로 소모적인 흔들기를 끝내고, 서울대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전국민이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할 때이다.
서울대 입학생의 상대적 수월성은 유일한 국립대학교이던 시절부터 태생적이었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건국 초기부터 학문, 문화, 교육, 보건, 산업, 경제, 정치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공적을 남겨온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망국론을 주장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서울대 탓으로 보이겠지만, 서울대가 우리 나라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이가 47.9%이고, 부정적인 이가 35.1%라는 여론조사도 있다. 서울대를 흔드는 이들의 주장은 학벌의 폐해와 입시의 폐단 두 가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해결책으로 언필칭 평준화가 주장되는데, 원하는 국민에게 똑같은 국립대학 졸업장을 주자는 것 같다. 이는 고등교육의 본질과 이상에서 크게 일탈된 것이며, 이미 혁명정부 시절인 1961년에 시행착오를 겪은 학사자격고시와 같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 예견된다. 그들이 흔히 예로 드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도 그 실상은 기계적인 평준화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수월성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임을 알아야 한다. 소위 학벌의 폐해는 서울대에 관한 한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수월성이 있는 집단의 특성상 개인적 성취에 집착하고 조직적 집단적 양태를 띠지 않는 것이 사실이며, 서울대학교가 전통을 달리하는 12개 전문 고등교육기관의 연립대학 체제로 시작된 것도 다른 대학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수월성의 추구는 모든 국가와 모든 대학의 목표이고,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강력한 국제경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 한 방법은 자유 경쟁에 의한 우수한 대학생의 확보와 그들에게 수월성 있는 교육을 꾸준히 시켜나가는 데 있다. 많은 나라들이 적절한 대학입시 제도를 택하고 그 제도를 장기간 지켜나가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왜 그러하지 못하는가? 부와 권력의 분배는 이상이 될 수 있어도, 수월성은 분배나 평준화의 대상은 아니다. 수월성은 끊임없는 노력의 목표이며,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이지 쟁취되어야 할 결과는 아니다. 최고의 수월성이 노벨상 수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극히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국민은 서울대학교의 허상에 집착하고 실상을 잘 모르고 있다. 서울대가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 예산을 독식하며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사사로운 얘기이나, 서울대에 입학한지 50년째, 가르치기 시작한지도 42년째,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학원소요, 기초생계비에도 크게 못 미치는 월급, 다섯 여섯 과목의 과중한 강의, 여름 무더위, 겨울 강추위, 텅 빈 창고 같은 연구실, 수없는 불면의 밤, 아무 보상도 없이 36년간 계속한 세미나, 그런 세미나 후 늦은 저녁 제자들과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싸구려 막걸리의 맛… 그러면서도 꿈을 키웠고 서울대를 키웠다. 지금도 서울대는 결코 「좋은 학교」가 아니다. 서울대는 이 지구촌 구석에 있는 약간의 상대적 수월성을 지닌 학교일 뿐, 5천년을 살아왔고 영원히 살아나가야 할 민족이 자랑할 만한 절대적 수월성을 지닌 세계적인 대학은 아니다. 실제로 서울대가 연구다운 결과를 제대로 내기 시작한 것은 겨우 지난 십년 내외의 일이다. 이 어린 나무를 잘 가꾸어야만 큰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대학 하나만이라도 민족의 자산으로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선도적인 대학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난 50여 년간 서울대를 힘들게 키워온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제야말로 소모적인 흔들기를 끝내고, 서울대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전국민이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