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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2011년 3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金 英 蘭 국민권익위원장





   - 위원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여러 번 고사하신 것으로 압니다.

 “판사 경험밖에 없어 리더십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고 여러 가지로 부적격하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제안을 받고 사양했는데, 계속해서 못하겠다고 말하기 어렵더군요. 널리 사람을 써서 좀 더 잘해보겠다는데 저만 빼달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권익위가 중립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며 비판하는 곳이라면 내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결심했죠.”

 - 부군인 姜智遠변호사와 상의를 하셨죠.

 “남편은 적극적이었어요. `왜, 사람이 자기 체면만 챙기려 하느냐. 정말 필요해서 도와달라는데 응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정치에 문외한이고 권력 욕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해도 좋다는 것이었어요. 명분도 없고 더 이상 고집을 못 피우겠더군요.”

 - 포부라면….

 “권익위가 일종의 `옴부즈맨'이잖아요. 행정감시, 부패감시 등 옴부즈맨 기능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 생각이세요.

 “저도 저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상태예요. 사실 그동안 해왔던 판사업무와는 리더십의 성격이 다르잖아요. 처음 해보는 거니까 배우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 직원들이 몇 명이죠.

 “5백40명 정도됩니다.”

 - 3개 기관을 합친 거죠.

 “네. 그 외에 콜센터 직원이 1백10명 정도 있어요.”

 - 권익위가 3년 됐죠? 李在五 前위원장은 부패방지에 콘셉트를 맞췄다고 볼 수 있나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 분이 굉장히 성격이 정열적이라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고충업무도 열심히 하셨죠.”

 - `金英蘭표' 권익위는 어떤 모습일까요.

 “고위공직자들의 부패방지 의식 강화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어요. 고위공직자들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돼요.

 또 권익위를 통합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려고요. 권익위가 과거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現중앙행정심판위원회) 기능이 합쳐진 거잖아요. 밖에서 보기엔 여전히 이질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이념적으로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옴부즈맨으로서 세 가지 역할이 합쳐져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어요. 절차적으로도 행정심판 청구서를 접수하러 왔을 때 고충처리로 가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거기로 보내 최선의 방법이 없는지 찾아주고, 행정심판이 기각되면 고충민원으로 접수해 해결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부패신고로 왔는데 고충처리에 가까우면 그렇게 처리해주고요.”

 - 부패방지를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계획은.

 “고위공직자들의 뇌물수수 부패는 많이 줄었지만 연고주의 문화에 따른 폐단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요. 서로 잘 모르는 사람은 진입부터 차단되는 경우가 많죠. 개선을 위해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어려운 부분입니다. 국민들에게 의식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하는 게 충분한 것인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 공직자들의 재량권을 축소하는 것은 어떻게 보세요.

 “신뢰가 확보되면 재량권을 넓혀갈 수 있는데 우리의 사회적 자본이 OECD 평균보다 낮다보니 재량권을 축소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죠. 선진행정은 아니죠.”

 - 방안을 차차 만들어가야죠.

 “그래서 만든 게 규제형평제도죠.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입니다. 딱 1m로 선을 그어 놨는데 어떤 사람이 1.1m 정도이고 여러 정황을 봐서 허가해주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는 제도죠. 행정부에서는 형평성 문제로 재량을 발휘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권익위가 맡아 제도를 만들었어요.”

 -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전관예우에 대해 말씀하시다 곤혹을 치르셨는데.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앞뒤 정황에 대한 설명 없이 `전관예우는 없애야 한다'는 부분만 강조돼 좀 곤란했죠. 정말 큰 문제는 전관예우가 있다는 인식 자체거든요. 그런 인식이 사회 신뢰도에 큰 영향을 미쳐요.

 많은 경우 전직 판사, 검사가 변호사 개업을 하면 전관예우를 의식해 사건이 몰려옵니다. 전관인 변호사가 `나는 전관예우를 절대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안 맡는다'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 변호사가 개인적으로 판사와 접촉을 하지 않고 정당하게 업무를 처리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전관예우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개업 시 퇴임 전에 근무했던 법원의 일은 상당기간 수임 못하게 하는 법안이 국회 계류 중인데, 만약 그 법안이 통과되면 전관예우란 말이 없어질지 법조계 분들에게 물어봤어요. 없어지지 않을 거란 대답이 대부분이에요.

 또 미국 연방법관처럼 종신제도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취업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나와요. 한국적인 모델은 뭘까 고심하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이야기한 건데 기사 제목이 조금 자극적으로 나갔어요.”

 - 결국 신뢰 자본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그런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저도 속해있었지만, 판·검사 집단 스스로가 그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강제로라도 일정기간 취업금지를? 그게 참….”

 - 가혹한 부분이 있죠.

 “그렇죠. 그래도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공직에서 일한 사람은 그곳에서 습득한 지식과 노하우를 돈 버는 데만 써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를 해도 전관예우를 바라는 부패사건보다는 공익에 기여하는 사건에 집중할 수 있잖아요. 어쨌든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이지 제도적으로 막기엔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 대법관 시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전원합의가 가장 힘들면서 가장 재미있었어요. 팽팽하게 대립되면 합의가 재미있는데, 그 의견의 집필자가 되면 굉장히 괴로워집니다.”

 - 독해를 계속 하죠? 몇 번까지 써보셨어요.

 “상당히 많이 써본 편입니다. 다수의견, 반대의견, 별개의견, 보충의견. 여러 번 수정을 거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주말에도 나와 일해야 하는 날이 많았어요. 李容勳(법학59 - 63)대법원장님도 열심히 읽어보시거든요.”

 - 대법원장이 꼼꼼하게 읽어보시나 봐요.

 “그렇죠. 읽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안건, 전원합의도 완전히 파악하시고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도록 해주세요.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토론이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한 사람씩 의견을 물어봅니다.”

 - 기억에 남는 판결은.

 “좋은 판결로는 여성 종중원 판결이나 강의석 군 판결이고요. 재미있는 판결로는 제사 주재자로 아들에게 우선권을 준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반대 의견자였지만, 梁彰洙(법학70 - 74)·安大熙(행정73입)대법관의 의견이 명문이어서 무척 기억에 남습니다. 활동 중에는 2010년 세계여성판사회의를 개최한 일을 꼽고 싶네요.”

 - 그런 행사가 있었나요.

 “홍보를 적극적으로 안 했어요. 본부에서 이슬람 지역출신 등 판사들의 사정을 고려해 양해를 구한 것도 있고 당시 `천안함 사건' 직후라 굉장히 조심스럽게 했어요.

 원래 유럽에서 할 차례였는데, 2007년 유치 당시 우리가 종중원 판결과 호주제 관련해 적극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죠. 하지만 준비과정에서 대회 예산이 삭감되고 후원금도 모금을 못해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영국의 유일한 여성대법관 등 3백5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습니다. 외국의 오피니언 리더인 판사들에게 한국의 사법부를 알리고 우리나라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 민감한 질문인데, 개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그 이야기는 공직을 그만 둔 뒤에 하죠.”

 - 알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겠습니다. 姜변호사는 호남 분이시고 위원장님은 영남 분이신데 살아보시니까 어떻습니까.

 “저는 그런 게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나 남편이나 모두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생활을 해서 영·호남을 의식하고 살지는 않았어요. 문제도 없었고, 의외로 문화도 비슷하고요. 따뜻한 지역이라 음식 간도 잘 맞았습니다.”

 - 커리어우먼으로 시부모도 모시고 자녀들 양육하기가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요즘은 시부모와 따로 사는 가구가 많다보니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우리 세대만 해도 형제 중에 어느 한 사람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잖아요? 위에 형님 두 분이 외국에 계셔서 우리가 모실 수밖에 없었어요. 일하는 며느리다보니 시부모님 보시기에 부족한 점도 많았을 거예요. 굴러가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굴러간 거죠. 저만 특별하게 고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 부군께서는 집안 일을 잘 도와주셨나요.

 “결혼 후 큰 애가 초등학교에 갈 무렵 아버님께서 치매 증상이 나타나셨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아버님 방에 가서 같이 생활을 하더라고요. 아버님을 돕는 일은 남편이 거의 다 했어요. 그 전에도 자기가 챙겨야 할 일은 알아서 했어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남편이 나서서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도와줄 수 있는 선까지는 모두 도와줬던 것 같아요. 맞벌이하는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줘요. `살다보면 어려운 시기가 있는데 그리 길지 않으니 그 시기만 슬기롭게 대처하라'고요.”


 - 대안학교를 다녔던 따님들은 뭘 하나요.

 “첫째는 외국에서 취업 중이고, 둘째는 영화를 전공하고 있어요. 두 개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요. 자기도 만들지만 남의 작업에 스태프로 참여해 서로 품앗이하더라고요. 열심히 재미있게 하는데 직업으로 하기에 어려움은 없을지 조금 걱정도 됩니다.”

 - 康錦實 前법무부 장관, 趙培淑국회의원과는 경기여고 시절에도 친했나요.

 “친했죠. 서울대 생명과학부 盧貞惠(미생물75 - 79)교수도 있고요.”

 - 최근에 뵌 적이 있나요.

 “대법관 그만두고 康 前장관과 趙의원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어요. 정기적으로 만나지는 못하고요.”

 - 학창시절 단편소설도 쓰시는 등 글 쓰시는 걸 좋아한 걸로 아는데.

 “지금은 판결문이나 잘 쓰죠. 글 쓰는 능력이 계속 축적돼야 하잖아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재주가 아니니 문학적인 글을 쓰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죠.”

 - SF소설,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다고 들었어요.

 “SF는 현재 처한 사회를 비판하는 기제잖아요. `외삽'한다고 하죠. 다른 차원에서 우리 사회를 볼 수 있게 해주니까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 진보와 보수, 어느 쪽이신가요.

 “나눠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대법원 판결도 어떤 때는 보수 쪽, 어떤 때는 저 혼자 진보적인 견해로 나가 독자 의견을 쓴 적도 있고요. 진보나 보수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비전의 관점에서 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우리의 진보, 보수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가는 듯 합니다.

 “어떤 쟁점에서 대립한다고 했을 때 대립하는 요소를 뽑아내고 토론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청문회 당시 국가보안법 개정 논쟁을 많이 물어보실 때도 `국가보안법이냐, 형법이냐 등 형식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양쪽에서 문제되는 것을 추출해내서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죠. 다만 국가보안법이란 용어 자체가 진보 진영 측에는 과거에 상처받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이해해 주면서 해야죠. 폐지가 절대적으로 옳은가, 유지가 절대적으로 옳으냐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요.”

 - 법조계에 여성 후배들이 많아졌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여성 후배뿐 아니라 모든 법조계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공부 잘해서 안정적인 직업이니까 별로 고민 안 하고 오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후배들에게 물어봐요. `왜 법조인이 되려고 하느냐, 법조인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평범한 질문이지만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늘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 위원장직을 마치면 다시 서강대로 돌아가시겠네요.

 “네. 강의 준비하면서 평화로웠던 그 몇 달이 그립습니다(웃음).”

 - 로스쿨제도가 성공할까요.

 “성공하도록 만들어야죠. 오늘도 간부들과 우리 사회의 부패인식지수(CPI)를 올리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작년에 특례채용이 많이 문제됐잖아요. 어떻게 보면 4지선다형 시험만 봐서 뽑는 것 외에 특례채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할 단계에 와 있지만 신뢰도가 못 따라가서 어려운 부분이 많죠. 어떤 측면에서 로스쿨은 특례채용과 비슷한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것과 로스쿨의 성공이 함께 가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동창회가 모교 개교 원년 찾기 사업을 통해 개학연도를 1895년으로 복원시켰고, 장학빌딩을 완공해 모교 지원을 획기적으로 증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창회나 동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모교 평의원회에서 林光洙회장님을 뵙고, 여기 와서도 몇 번 뵈었어요. 대단하신 분이세요. 회장님 건물에 위원회가 있다보니 여러 가지 부탁드릴 일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흔쾌히 들어주시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와서 가장 강조하는 말이 솔선수범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서울대 동문들은 정말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솔선수범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도 잘 해주셨지만 사회지도층으로서 일정기간 동안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헌신해주신다면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훌쩍 높아지리라 믿습니다. 선봉장 역할을 우리 동문들이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동창회보라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사진·정리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