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호 2011년 3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不偏不黨과 모교 사랑

얼마전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과 좋은 저녁자리가 있었다. 최근의 개헌 추진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는데, 선배님은 개헌 찬성론자든 반대론자든 관련 정치인들은 뭔가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했다.
“不偏不黨, 즉 아주 공평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어야 진정한 토론이 가능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계파는 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당파성은 정당정치의 기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응했다. 그랬더니 “代議 민주주의의 대주주인 국회의원은 `자신의 나침반'으로 방향 설정을 하고 소신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선배님은 “불편부당한 정치인의 나침반을 종교에 비유하자면, 기독교인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신앙 생활의 기본으로 삼는 것과 같다”며 “하나님이 중심에 있으면 가령 교회 내부 갈등 등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도 했다.
이런 논조를 졸업생들과 모교와의 관계 설정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사실, 집착이란 단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뭔가 인연이 있는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게 있다면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분명히 집착과 다르다. 또 확실한 사실은 `무관심'이라는 단어하고는 양과 질을 달리하며 거의 반대점에 있다는 것이다.
초·중·고교, 대학까지 포함해 젊음을 함께 했던 학창시절의 추억이 진하게 배어 있는 모교에 대해서도 가장 좋은 관계 설정은 `사랑'일 것이다. 모교 집착은 어떻게 보면 집단 이기주의로 비치고, 최근 개헌 논란에서 등장하는 `계파 결속', `그들만의 리그' 등과 같은 단어와 더 잘 어울릴 수도 있다.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집착은 어느 면에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넘치는 사랑'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낳아 주고 길러준 부모님에 대해 자식이 집착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듯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모교를 지나칠 정도로 집착한다고 코앞에서 직설적으로 잘못됐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교만을 놓고 볼 때 집착보다 훨씬 안 좋은 관계 설정은 단연코 `무관심'이다. 모교에 대해 특정한 이해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사랑'을 보이고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모교 사랑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선 저마다 졸업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역할의 구체적 내용은 백지로 남겨두고 싶다. 최근 서울대 `개학 연도'의 설정은 모교 사랑의 대표적인 예임에 분명하다.
대학마다 새내기를 맞은 3월, 서울대 졸업생들은 모교와의 관계 설정에서 `사랑, 집착, 무관심' 세 단어 중에서 무엇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지, 자신의 무게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곱씹어볼 수도 있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