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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2011년 2월] 문화 꽁트

호접몽(胡蝶夢)



 TV에서는 9시 뉴스가 막 끝나고, 주중 연속 방송극이 시작되기 전, 상품 선전 광고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선미는 모처럼 얻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한 남편이 일주일은 집을 비우게 됐기 때문이다. 때마침 따르릉하는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며 수화기를 들었다.

 “얘, 잠깐 내려 와. 그 앞 포장마차에서 쐐주 한 잔 하자.”

 중학교 때부터의 절친 소영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선미는 두꺼운 패딩잠바를 걸치고 맨 얼굴로 나갔다.

 비닐 휘장을 들치고 들어간 포장마차 안에는 연인인 듯싶은 젊은 남녀가 어깨를 감싸고 소곤대고 있고, 만취된 백발의 영감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쪽 구석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소영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손짓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선미가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걍 기분이 좀 꿀꿀해서…”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오자 소영이 익숙한 솜씨로 병마개를 따고, 선미 잔에 술을 따랐다. 선미는 술병을 빼앗아 소영의 잔을 채웠다.

 “당. 신. 멋. 저.”

 둘은 잔을 들어 부딪치며 합창했다. `당. 신. 멋. 저.'는 `당당하고, 신나고, 멋지게, 저주면서 살자'는 건배할 때 하는 신조어다.

 “엄만?”

 소영이가 치매 요양병원에 있는 선미 친정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요즘은 식사도 잘 하신대. 간병인이 아주 많이 건강해지셨다고 하는데, 글쎄 그것이 반갑지만은 않더라. 이런 내가 넘 싫다”

 뽀얀 선미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선미 친정어머니는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밑에서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남편을 받들고, 선미 3남매를 정성껏 길렀다. 선미 할머니가 70대에 이르러서는 치매로 어머니를 더욱 힘들게 했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해대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경대 앞에서 식사하다가 당신의 밥 먹는 모습을 보고는 “저 몹쓸 년이 나는 밥 안 주고 저만 처먹는 것 좀 봐”라며 밥그릇을 던져 거울을 깨부수어 집안이 아수라장이 된 적도 있었다. 십 수년을 고생만 한 어머니는 3남매 결혼시키고, 할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저 세상으로 떠난 후, 좀 편한 삶을 사는가 싶었는데 치매에 걸렸다. 정성 들여 키운 자식들은 누구도 어머니를 모시려 하지 않았다. 치매 요양원에 보내진 처음 얼마동안은 집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손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화장실 간다며 슬금슬금 빠져 나올 때면 가슴이 미어졌다. 요즘은 아예 체념하는 모습이 선미는 더 안쓰러웠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리지만,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옛말은 거짓이 아니다.

 몇 번인가 손님이 들고나던 포장마차 안에는 선미와 소영이, 중년 남자 두 사람 -안경을 쓴 남자와 땅딸막한 키의 누런 잠바 입은 남자- 그렇게 네 사람뿐이었다. 누런 잠바가 선미네로 다가오며,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

 “우리 삐까삐까하이 비스무리한 것 같은데, 합석하면 안 되겠능교?”

 서글서글한 소영이 “그러지요.” 했다. 누런 잠바가 안경잡이를 손짓해 부르며

 “뭐 하는 아지맨데 이 시간에 이카고 있능교?”라고 물었다.

 어느새 안경잡이도 다가와 소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파출부 일 끝나고 하도 고달파서 친구와 서로 신세 한탄하고 있는데요?”

 소영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런교? 우리는 청소분데 우리도 이하동문이라예.”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스스럼없는 잡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힘겹게 걸치고 있던 체면이란 옷을 훌훌 벗어 던진 후의 편안함이었다.




 느닷없이 누런 잠바가 안경잡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이눔아가예∼ 카수라예. 우리 이눔아 노래 한번 들어보입시더.”

 하는 것이 아닌가. 몇 번 사양하던 안경잡이가 계속되는 박수에 마지못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을 감미롭게 불렀다. 소영이가 선미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 친구도 가순데요.”

 하며 노래하기를 강요했다. 선미가 누군가. S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재원이 아니던가. 지금 세계적인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선미 동창보다 못하지 않은 실력을 갖고 있는 선미였다. 소영의 재촉에 선미는 김수희의 `남행열차'를 간드러지게 불렀다. 신이 난 안경잡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금수현 작곡의 `그네'를 일류 테너 못지 않게 불렀다. 포장마차 주인 내외까지 앞치마를 두른 채 옆에 앉아 큰 박수로 흥을 돋우었다. 선미도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을 고음으로 처리했다. 두 사람의 노래 대결이 됐다. 아니, 두 사람의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놀란 눈초리로 바라보던 안경잡이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원어로 불렀다. 마지막 구절 `탄토라비타'라 했을 때는 비감하기까지 했다. 선미도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어느 맑게 개인 날'을 손짓까지 하며 원어로 불렀다. 모두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했다.

 시계는 어느새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파출부와 청소부의 그룹 번개팅'이 너무나 즐거웠다며,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밖에 나왔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함박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선미가 대학 입학한 것은 광주사태가 일어난 다음 해였다. 교내에서는 끊임없는 집회와 데모가 벌어졌고, 최루탄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선미는 짭새에게 잔인하게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고 분노하면서도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함에 자괴감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치매인 할머니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것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집안 어른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난 지 3개월만에 졸업도 하기 전. 학교와 집에서 도피라도 하듯 선미는 결혼했다. 대학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라는 것이 집과 학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됐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의 냉담하고, 독선적이며, 까다로운 성격이 선미를 힘들게 했다. 진지하게 대화라도 나누려 하면, 피곤하다거나 할 말이 없다고 회피하기 일쑤였다. 가정부로서의 존재감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고, 남편이 야속했다.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 번의 가출 끝에 겨우 허락 받아 결혼한 소영이가 선미는 부러웠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던 소영의 남편은 사업한다며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그 땐 내 눈까풀에 콩깍지가 씌웠던 거야. 그 인간이 뭐가 좋았던지. 허황하다는 울 엄마 말씀이 백 번 옳아. 엄마 말 안 들었다가 이 나이에 고생만 하고 있지 않냐?”

 소영의 탄식에 선미는 서로 사랑하면, 그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했다.

 “철없는 소리하지 마. 뭐, 사랑이 밥 먹여 주던?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 그리 오래 안 가. 옥시토신인가 뭔가 하는 호르몬이 맥시멈 3년이면 끝난다지 않니? 로미오가 맨날 `사랑의 가벼운 날개를 달고…' 어쩌고 할 것 같냐? 이도령인들 나이 들어서도 춘향이에게 `어화둥둥 내 사랑아…' 그럴 것 같냐구”라며 소영이 열을 올렸다.

 누구나 못 가본 길이 가고 싶고, 하지 못하게 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더 크지 않던가. 선미는 좋은 목소리를 썩힌 것이 아쉽고, 전업주부로 자녀 둘을 기른 것 외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늙어 가는 것이 서글펐다.

 그런데 지난 밤, 느닷없이 나타난 안경잡이가 선미를 3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마음이 들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안경잡이의 노래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아 밤잠을 설쳤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을 선미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당발인 소영이 달려와 빅뉴스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얘, 너 왕재수 알지?”

 선미는 중학교 때, 재벌 외손녀로 그랜저 타고 거들먹거리던, 싸가지 없는 양지수, 모두가 왕재수라고 불렀던 친구를 떠올렸다.

 “글쎄 그 안경잡이가 왕재수 남편이래. 청와대 비서실의 아무개라는데?”

 “모든 게 꿈이었어. 인생이 일장춘몽 아니던가.”

 선미는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