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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2010년 11월] 문화 꽁트

검은 노인



 사람들의 흐름이 가파르게 흘러간다. 안국역 6번 출구 층계참, 그는 고개를 쳐들어 잠시 숨을 고른다. 네모진 하늘을 배면으로 사람들의 하반신들이 빠르게 교차한다. 늘 이 계절, 인사동 하늘은 푸르죽죽하거나 미적지근하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은 까마득하다. 올라가야지. 그런데, 어쩌자고 벌써부터 조임 붕대라도 감은 듯 가슴이 죄어온다. 인사동이 그의 생리에 반응하는 습관적인 밀폐감인지도 모른다. 인사동은 그에게 있어 무언가의 `문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그는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일터인 사과밭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의 딱딱한 것이 자꾸 살갗을 찔렀다. 사촌누이, 경미의 그림 전시회 카탈로그일 것이다. 그제야 그의 안에서 일주일 내내 움츠리고 있던 갈망의 단편들이 명치끝에서 불쑥 솟구쳐 올랐다.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쪽을 넘보는 따위는 부질없는 일이라고, 그는 발걸음도 마음도 오므리고 있었다.

 안숙이도 몇 점 찬조출품 했어요. 오빠, 너무 오래 숨어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덧붙였다. 많이 안 좋아요. 안숙이요. 왜? 어디가? 그가 연거푸 물었다. 우울증인지, 어디 내장이 고장났는지, 암튼 다 죽게 됐다니까요. 내참, 다 죽게 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건 뭔가? 그는 혀를 찼다. 아직 마흔 중반의 멀쩡한 생을 방치하다니, 안숙의 나른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예기치 못한 그리움이 그를 촉발시켰다. 그는 실에 꿴 바늘처럼 대구역으로 내달렸다. KTX는 90분 만에 그를 서울역에 부려 놓았다. 1일 생활권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물리적 메커니즘이든, 정신적 메커니즘이든 간에 편리하고 다양한 삶의 방편을 기피할 이유는 없다.

 비록 서울에 발 못 붙이고 낙향한 변방인생이지만, 한때 디자인이라는, 생활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로서는 미래지향적 형태 조작에 목숨을 걸었던 적도 있었다. 한겨울 쪽방의 살얼음 낀 요때기를 깔고 앉아 매번 도루묵으로 마감되는 현상공모, 손가락에 동상이 걸린 채 취업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위해 수없이 쓰고 찢던 이력서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디자인이나 생활도 하나의 형태라는 자각을. 자신의 삶이 어떤 형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 결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의 형태라는 틀 속에 포함된다는 무거운 진실이 눈앞에 명징하게 떠오르는 순간, 그는 모든 걸 훌훌 털어내고 아버지의 과수원으로 잠적했다. 그건 형태를 갖추지 못한 자신의 어설픔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안숙은 낙향하려는 그를 비웃었다. 깨버려, 디자인은 형태 자체를 부시는데 의미가 있는 거야. 일단 완주씨의 고정관념을, 고착된 패턴을, 그런 자신을 깨부수고 나와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디자인에 골인할 수 있는 거야. 먼저 등 돌린 게 그녀였는지, 그 자신이었는지 모호하다. 그냥 그런 와중에서 서로의 등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그쪽 세계하고는 이미 문 닫아 건지 오래 됐다.

 높고 아득한 그쪽, 왜 가는 지, 안숙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건지, 경미의 그림 전시장에 꼭 자신이 나타나야할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는 그 부분에서 생각을 잠시 멈춘다. 아주 잠깐 동안 얇은 눈꺼풀이 자잘하게 떨리고, 그의 감은 눈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기가 스미는 동안 그의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린다. 그냥 달려가는 거다. 부지런한 농사꾼으로 견디기 위해 저지르는 헛발질, 아주 작은 부랑, 나름대로의 생존방식 같은 건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삶을 견디게 하고, 때 없이 술렁이는 가슴을 억제하고, 평정에 이르도록 조율하는 그 낭만의 한 꼬투리마저 압수당한다면 살 가치를 잃을 지도 모른다.

 4년 전, 안숙의 수채화 전시회에 올라 왔다. 전시회 초대장 겉봉에, 올라 올 거지? 안숙의 육필이었다. 이미 그때 그녀는 혼자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문화부 신문기자하고 결혼해서 1년을 고비로 헤어진 모양이었다. 안숙의 일상들은 그녀와는 고등학교 동창인 경미가 메일로, 혹은 전화로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번 출행은 그런 휘청거림이 아니다. 경미의 전시회를 빌미로 그녀의 근황이 그를 달뜨게 만들었다.

 조안숙, 그 이름을 부르거나 들으면, 아리고 저린 통각이 몸의 깊고 어둔 곳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는 내내 혼자였다. 결혼이라는 형태가 그를 거부했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틀 속에 안주할 자신이 아니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안숙이 혼자됐을 때 잠시 생각했다. 그녀를 내 인생 굴레로 이입시켜도 될까? 건강한 접목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안숙이 왜 결혼 안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안숙이 느닷없이 그 말을 뱉어냈다. 완주씬 정말 덜렁방귀야. 남의 마음 같은 건 읽을 생각도 안 해. 거죽 밖에 볼 줄 모르지.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안숙이 빗긴 눈길로 바라보았다. 관심이었는지 적의였는지 혹은 사랑이었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왠지 조금 미안했고, 많이 아팠다. 그러나 이제, 안숙이 아프다면 내가 그녀의 생을 접수하리라는 절박함이 그를 여기까지 내몰았을 것이다. 바짝 졸라맨 목댕기처럼 오랜 세월, 억제하고 가두었던 그놈의 형태라는 틀에서 그는 시나브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인사동을 걷는다. 조수처럼 쓸리고 밀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잠시 그 혼란 속에 자신을 세워둔다. 깊고 두텁고 건조한 모래사막을 헤쳐 나온 것 같은 홀가분함, 싱그러움,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목마름이 교차하면서 일시에 폭죽처럼 터진다. 이거였나? 인사동은 그에게 있어 삶과 환상의 점이지역이다.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일 년에 서너 번 올라오곤 했다. 안숙이나 경미를 불러내지는 않았다. 단지 안숙이 숨쉬고 있는 인사동 언저리를 맴돌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경산 버스터미널이나 서울역 광장에 발 걸치고 서서 반생을 날려 버렸다. 등골 휘어지도록 농사지은 사과 한 상자나 쌀 한가마니 팔면 얼마나 남는다고, 이 지랄인가, 그는 스스로를 수없이 질책하고 후회하고 반성한다. 눈두덩에 얹힌 현기증을 손바닥으로 훔친다.

 가슴이 설렌다. 이 공간 어딘가에 안숙의 향기가 스며 있으리라. 온유하고 나른한 이미지에 겹쳐진 그 가늠 안 되는 열정의 토로는 너무 버거워 다가갈 수 없었다. 전시장 들머리 벽에 눈이 가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춘다. 거기 안숙의 이름자가 붙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검은 노인', `콩깍지 어르는 손', `오디 따는 검은 남자', `까만 치아' 그리고 1백호짜리 대형 캔버스가 그의 눈을 확 잡아당긴다. `수로와 갈대'. 끌어온 물길이 새지 않도록 나무 각목으로 덧댄 수로 양편으로 허연 억새가 어우러졌고, 오른 편 구석에 아프리카의 부시맨 같이 생긴 노인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까맣게 오그라든 노인, 영락없이 그 자신이다.

 언젠가 모임자리에서였다. 뒤늦게 자리에 온 안숙이 앉자마자 그 특유의 코 주름을 잡고는 살포시 웃었다. `검은 노인' 오셨네. 했다. 무슨 뜻이냐고, 이제 겨우 서른 고빈데, 내가 노인으로 보여? 그런 말도 한 것 같다. 너무 편한 얼굴이라서, 안주하고 싶은 분위기잖아. 뒤늦게 합석한 경미도 한마디 거들었다. 오빤, 사람을 편하게 해요. 마음의 지퍼가 깊숙한 데까지 열려 있어, 무슨 말이든지 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잖아요. 갑자기 나타난 경미가 킥킥거린다. 오빤 덜렁방귀래. 덜렁방귀? 그는 헉, 헛바람 빠지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런지도 모르지. 그는 맥없이 웃는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를 밀어내고 있었기에, 그때 그의 심장에 빗금 하나가 지나갔다. 나는 아니다, 그는 서울에서의 뜨내기 생을 포기했다. 창조행위란 아무나 하는 짓거리가 아니라는 명징한 깨달음이 그를 후려쳤다.

 내가 너무했지? 모델료도 안주고. 안숙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노인이냐? 하필. 그가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안숙이 나직이 웃는다. 농익었잖아. 안과 속이 까맣게 무르익었어. 무르익은 과육에서 배어나온 향이 세상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잖아. 그게 진국이라는 것과 동의어라는 거 몰라? 정말 덜렁방귀네. 완주씬, 그렇게 익은 세월을 살고 있잖아. 때로는 쓸쓸하고 슬퍼도 그냥 웃고 살아야지, 완주씨처럼…. 경미가 웃음보를 터뜨렸고 그도 덩달아 웃었다. 밤이 내리는 썰렁한 전시실 가운데 선 세 사람은 조금 오버한 것 같은 폭소를 저마다 게워냈다. 그건 마침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토해낸 웃음소리는 조금은 과장되고, 조금은 을씨년스러웠고, 많이 쓸쓸했다.

 저녁은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갑자기 안숙이 가슴을 잡고 주저앉았다. 잠깐이면 돼, 화장실로 뛰어 갔다. 경미가 뒤따라갔다. 한참 만에 나온 경미가 귓속말로 위경련이야. 너무 무리한 거예요. 안숙은 어느새 말짱한 얼굴로 나왔다. 고마워. 저녁은 다음에 해야겠네.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해. 병원에 가자. 진작 병원으로 갔어야지. 그의 입에서 쇳가루 씹은 듯한 탁한 목소리, 아니라고 고개 흔드는 안숙이. 병원 같은 데 안가. 우울증이란 게, 영혼의 감기라고 하던데, 병원엔 뭐 하러 가? 난 지금이 행복해. 일 년, 내내 사과 보내주는 완주씨도 있고, 경미도 있고, 나만큼 행복한 사람도 드물 거야…. 숨을 고른 다음 말을 덧붙인다. 과수원 농사는 어때? 안숙이 웃는다. 물그림자 같은 얼굴이다. 한여름 잡초 고비를 넘기고 나면 열매 속기로 또 한 차례 작업을 해야지. 매번, 못난 열매들을 고르고 골라 따낼 때면 손길이 더디고 무디어져. 솎아낸다는 것, 사람이나 과일이나 채소나 마찬가지 아닌가. 구실 못할 물건들은 초장에 솎아내 버린다네. 젊은 날, 그림 그리기에 열정을 쏟아내던 그의 여린 정서는 이런 솎아내는 일에 손이 무거웠을 것이다. 그 자신도 솎아내진 잡초처럼 내동댕이쳐진 건 아닐까. 끝까지 버텨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이야말로 스스로 이 거대한 도시에서 밀려난 꼴이다.

 그는 문득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시간의 단면'을 떠올린다. 두 개의 나뭇가지에 걸쳐져 쇳물로 녹아내리는 시계, 청동 조각품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곡선이라는 건 없다. 일회적인 단면이 있을 뿐이다. 눈물 흘리는 시계, 현실에서 그런 형상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현실과 환상 속에서 바라보는 시간의 막간이 암시하는 은유는 인간의 내면에 적체된 채 분출하지 못한 원형질의 욕망인지도 모른다. 반평생 안숙이라는 여자를 품고 살았던 허망함이 저물녘, 인사동 네거리에 빗물처럼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