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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2010년 1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李 泰 鎭 국사편찬위원장



 - 모교 개교 원년 조정 사업의 이론을 제공해 주셨는데, 결과에 아쉬운 점은 없으세요.

 “그만하면 잘 된 거 아닌가 싶어요. 원래 개교 원년 조정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모교가 전 세계 10위권 내로 진입하는데 역사가 너무 짧다는 점에서 시작했는데요. 저도 이번에 꼼꼼히 연구하면서 느낀 거지만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면면한 역사의 흐름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해외에 나가는 학교 소개 책자에는 개교 원년과 개학 연도 둘 중에 하나를 때에 맞춰 쓰면 되겠죠.”

 - 국사편찬위원회 분위기가 너무 좋네요. 건물도 멋있고. 일하는 분들이 몇 분이세요.

 “연구직만 46명 정도 돼요. 대부분이 박사학위를 갖고 있어요. 너무 조용하죠”

 - 정말 학문적인 분위기에서 공부하기엔 최적의 입지 같아요.

 “숨어서 뭐 하는지 몰라요.(웃음) 이 방 만한 공간에 2∼3명이 들어가는데 서울대 교수연구실보다 낫죠. 박사급 인재들이 모여 같은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최대한 살려 나가면 우리나라 역사를 발전시키고 재조명하는 훌륭한 두뇌집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임한 후에 상황 파악을 해 보니까 편찬위 연구원들이 대학 교수가 못됐다고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고 오히려 한국사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일류 학술기관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사를 편찬하는 곳인가요.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요. 조선시대 춘추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실제로 대한민국사, 상해임시정부사 등을 편찬했지만 학계에 연구자료를 공급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 교과서와는 상관이 없는 거군요.

 “사실 검인정 시행 전에는 국사편찬위가 국정교과서의 주무기관이었어요. 검인정 제도로 바뀌면서 교육과학기술부로 검인정권이 넘어갔죠. 그런데 전문성이 떨어지는 등 검인정 제도의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서 지난 8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검인정 관리업무를 유관기관으로 이관한다'는 방침에 따라 한국사 검인정 업무가 편찬위로 넘어오게 됐습니다.”

 - 그건 잘된 일이네요. 국민들은 국사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데, 정부에서는 어떻게 선택 과목으로 결정을 내렸을까요.

 “소위 3공화국 때는 국사가 필수였다가 5공화국 때 선택으로 바뀌었는데, 그게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하나는 당시 군사정권을 타도한다고 학생 운동이 강했잖아요. 그때 잘 아시다시피 계급투쟁설이니 뭐 이런 것이 한국 현대사 설명에 많이 도입됐고, 그 폐해를 구실로 해서 필수과목에서 없애버렸습니다.”

 -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 꼴이네요.

 “맞아요. 그게 하나 있고 또 국사가 선택 과목이 되면서 사회 과목과 연관된 분야의 교사들도 국사를 가르칠 수 있게 된 점이죠. 모든 사범대에 교육학과가 있잖아요. 그 분들이 대부분 사회 교사가 되거든요. 일부 사회 교사는 어떤 과목에 대해서 일정 연수만 받으면 가르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사학과 출신들만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국사가 필수 과목으로 복권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있어요.”

 - 다수의 이해관계층이 있어서요?

 “그게 현실이에요. 또 반성해야할 점이 역사교과서가 재미가 없어요. 검인정으로 되면서 현장경험을 살린다고 교사들도 집필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동필자 5명 가운데 교수는 1명밖에 안 되고 나머지 모두 고등학교 교사예요. 그 분들이 교과서의 대부분을 씁니다. 그 분들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교과서든 연구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작업을 해야 서술에 힘이 있고 내용이 풍부해집니다. 그런데 교육 경험만 있는 사람들이 교과서를 집필하다 보니 참고서처럼 돼버려요.

 학생들이 그럽니다.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사건을 나열해서 연대를 외우라고만 한다. 그러면 하기 싫다.' 국사를 공부해야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재미가 없어서 멀리하는 학생들이 참 많습니다.”

 - 아직도 우리나라 교과서는 `영희야 철수야' 하던 시대의 재질에 그 삽화, 그 내용으로 돼있잖아요. 요즘 좋은 책이 얼마나 많아요. 아이들 동화책만 봐도 일러스트레이션이 너무 좋은데 교과서만 발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국정 감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미국 교과서와 우리 교과서를 갖고 와서 `비교해 봐라' 그러더군요. 많이 떨어지죠. 내용이 좋으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국사편찬위로 검인정 역할이 넘어오면 검정교과서의 서술 형식, 적어도 이런 식으로 써라,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제시를 하면서, 학생이 왜 이런 역사가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요. 사건 나열식으로 하지 않고요. 학생 설문을 해보면 연대를 섞어 놓고 `바르게 짝 지어진 것을 고르시오' 같은 시험 문제를 제일 싫어한데요. 그래서 선택을 국사 과목으로 안하고 사회로 가버린대요. 우선 학생들이 좋아하는 교과서가 되도록 유도를 하고 교사들의 문제, 즉 사학과 출신들이 가르쳐야 설명도 풍부하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다고 봅니다.”

 - 교과서는 사실 아주 작은 부분이고 앞으로 하실 사업들이 정말 많으시죠.

 “검인정 업무는 전 국민 교육에 직접 영향을 주는 중요한 부분이니 기반이 잡힐 때까지 열중해야겠고, 그밖에 여기서 하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예산이 많지 않아 재단 설립도 고려하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처럼 재단을 만들어 재원이 확보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죠.

 편찬위에서 해외 사료도 수집하고, 국내 구술 자료도 수집하는 등 정부 수립 이후 이 것 저 것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오다 보니까 굉장히 많은 일을 벌려놨어요.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선택하고 집중을 하려고요. 특히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허점이 많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문제도 확실하게 연구자들이 잡아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줘야죠.”

 - 편찬위에서 한국사 강좌를 열면 좋을 것 같아요.

 “이미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국정 감사 전 교육과학기술부 산하기관장들이 모일 기회가 있었어요. 초반에 각 기관들이 지난 1년간 일들을 보고하는 시간이 있더라고요. 그 때 이런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영어로 번역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일입니다. 영어권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거죠. 조선왕조실록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서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 받았잖아요. 학문적으로 세계 학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우리 것을 세계 각계각층에 알리는 일이니 도와달라고 그랬어요.

 또 하나는 편찬위가 한국사 학습에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니까, `리더십 한국사'란 제목으로 과천과 광화문에 강좌를 개설하겠다고 했어요. 국회의원들이 원한다면 여의도에도 개설할 수 있고요. 범학계적으로 강의를 알차게 해 줄 수 있는 분들을 동원해서 내년 초에는 발동을 걸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 와중에 사학자들도 양대로 나눠진 면이 있죠. 그런 것들이 다시 뭐라 할까, 22세기를 바라보며 합의를 이루고 절충해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게 참 힘들었어요. 교수 시절에도.”





 - 모교 개교 원년 찾기 논의 과정에서도 힘들었잖아요.

 “현상적으로 보면 좌익 역사관은 항일 독립운동 성격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죠. 그런데 해방 정국에서, 남북 분단 속에서, 대한민국 쪽에서는 좌익 타도가 계속 됐단 말이죠. 억압을 받다보면 억압받는 것 자체로 정당성이랄까 하는 게 생기죠. 탄압 받는 쪽은 자기가 실제로 실험이나 실행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고난을 받으면 정당하다는 인식이 생기죠.

 일본의 경우 극렬한 좌익이 있었지만 천황제 하에서 탄압이 아니라 그냥 풀어놨잖아요. 결국 7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에 사회주의 정당은 있지만 공산당은 약화됐죠. 우리나라는 분단상황 속에서 좌파가 용납이 안 되니까 지식인 사회에서 더 강하게 형성됐죠.

 문제는 민족사예요. 역사는 민족사죠. 그런데 민족과 국가가 일치됐을 때는 그냥 민족사가 국사가 되는데, 우리의 경우 민족이 분단돼 2개 국가로 돼 있단 말이죠. 대한민국이란 국가 입장에서 먼저 역사를 정립하고, 민족통일 지향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것을 부차적으로 세워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구한말은 우리가 왠지 외면하고 싶은 역사잖아요. 그 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 동기가 있으신지.

 “조선시대史 연구자들은 영·정조 등의 국가 운영을 연구하다보면 `쉽게 망할 나라가 아니다'라는 신념을 갖게 돼요.

 더 직접적인 계기는 1988년부터 모교에서 규장각 도서실장을 했어요. 그때 규장각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소책자를 만들었어요. 외규장각 자료를 법령부터 먼저 정리하다 보니 프랑스 로즈 제독이 병인양요 때 퇴각하면서 본국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값나가 보이는 책 3백여 권을 수장할 만한 가치가 있어 가져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우고 갑니다.'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국제법을 전공하는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정부를 통해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요청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고종시대에 생산된 국가 공문서를 정리하다가 법령 가운데 순종황제 칙령을 보게 됐는데 사인 필체가 대 여섯 개, 완전 다른 게 나오더라고요. 이게 뭐냐, 사실을 확인해 보니 통감부 아래로 대한제국 정부를 집어넣는 관계 법령들이에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일제 통감부 관리들이 황제의 사인을 마구 위조해서 마음대로 법령을 만든 거예요.

 더 의심을 갖고 국권을 빼앗은 조약들의 원본을 꺼내 봤어요. 을사조약의 경우 제목도 안 달려 있고 `제1차, 제2차 日韓협약'이란 것은 사후에 차수를 붙인 거더군요. `황제와 정부가 무능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라는 기존의 당연시되던 명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됐죠. 의심을 갖고 확인을 해 보니까 기존의 인식을 뒤집는 사료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연구 분야가 바뀌었죠.

 저는 일본 식민지 역사, 고종시대에 대한 왜곡된 교육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면면이 이어지는 우리의 국가史에 대해 뚜렷한 승계의식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조선왕조, 대한제국의 승계관계가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역사를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이 한국 사학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 지난 5월에 일본 학자들과 함께 한·일병합 무효, 불법 성명서를 발표했잖아요. 일본 사학자들과 소통을 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지 않았나요.

 “그렇죠. 우리 세대가 특히 반일 감정이 굉장히 강했죠. 대학시절 국사학과 연구실에 들어가 보니 읽어야 할 책은 전부 일본 책이에요. 안 읽을 수는 없단 말이죠. 2학년 때 학교 앞 일본어 학원에서 공부를 하는데, 당시 분위기가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공부는 하지만 말은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그때 정서였죠.

 2010년 한국 강제병합 1백년을 기념해서 양국 지식인들이 한국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공동성명에 양국 5백명을 목표로 했는데 양쪽 모두 5백명을 넘었습니다. 일본이 5백40명, 우리가 5백99명. 특히 일본측 절반 이상이 역사학자였습니다. 그 전에는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10명이 안 됐습니다. 이건 획기적인 변화예요.

 문제제기는 한국측에서 저를 중심으로 했지만, 일본 내에서도 자체적으로 5년 전부터 연구결과가 많이 나왔습니다. 최근에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 일본의 군부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울의 장사패라는 것은 연막이었다'라는 연구도 나왔어요. 국가 범죄라는 점을 일본 내에서도 밝혀낸 것입니다. 또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 중에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그 예로 들었는데, 와다 하루키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건 허구라는 거예요. 이런 연구들을 결집해 보니 자기네도 더 버티는 것은 학자적 양심으로 `기만'이란 생각이 들어서 많은 일본 학자들이 서명에 동참한 것 같아요.”

 - 경제적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의 `말빨'이 안 먹히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사과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발뺌으로만 계속 해온 역사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요즘 성균관대에 와있는 일본 교수 미야지마 히로시란 분이 큰 화두를 던지고 있어요. 한국에 온지 8년이 지나면서 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이대로 가면 일본은 완전히 망한다, 무사계층에 대해 미화된 역사를 동아시아사에서 중심 화두로 계속 고집하면 일본은 완전히 고립된다'는 주장을 계속 하고 계시죠. `과거 중국, 조선의 역사로 보면 책봉, 조공 질서라는 틀 속에서 평화공존 관계를 계속 유지해 온 게 동아시아의 본류다. 누가 이기나 힘겨루기로 팽창주의로 간 일본의 `무사 사회' 전통이 거의 유일한 예외 케이스인데 그걸 일본민족의 선진성으로 미화해 왔고 일본 역사학계가 지금까지 이를 거들어왔다. 이제는 벗어나자'고 제언을 하고 있죠.”

 - 일본은 어떻게 보면 경제력도 약해지고 오히려 위험한 것은 중국이잖아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편찬위의 대응은.

 “그 문제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맡고 있죠. 우리는 사료편찬을 탄탄하게 해서 우리측 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 밖에 없는데, 결국 중국이 원숙해지는 수밖에 없죠. 중국이 계속 그러는 것은 뭐라고 제동을 걸기 어려우니 그 주장이 국제적으로 먹히느냐 안 먹히느냐에 우리는 역점을 둬야 돼요. 그 한 방법으로 동아시아 범주에 속하는 역사사전을 우리가 영어로 번역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일입니다. 세계 각 국에서 검색할 때 우리가 연구한 동북아역사 내용이 나오면 중국측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 사람한테는 안 먹히거나 적어도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선제 작업을 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죠. 역사를 전공하게된 동기가 있으세요.

 “청소년 때까지 경상도 농어촌에서 보냈기 때문에 당시 정서가 내 관심 분야보다는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취업하기 좋은 분야를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고3 때 담임선생님을 무척 존경했는데, 그 분이 저한테 `나는 외교학과를 나왔지만 지금 다시 공부한다면 사학을 하겠다. 역사 공부가 참 중요하더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케네디 정부에서 특별보좌관을 지낸 아서 슐레진저가 역사를 전공했다는 등 귀동냥도 있고, 또 역사 공부를 좋아해서 부모님은 썩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사학과에 입학하게 됐죠. 입학해서 처음에는 당시 트렌드인 서양사를 해야지 하다가, 대학 3학년 전공을 선택할 땐 국사를 선택했어요. `한국인인데 국사를 해야지' 하는 단순한 마음이었죠.”

 - 후배들이나 재학생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또는 역사학자로서 조언을 해 주신다면.

 “뭘 하든 간에 근본에 충실한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게 모든 것을 만드는 원천이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제 경험으로도 보면 외규장각 반환이나 일본의 한국병합 불법성 문제 등을 밝혀낼 수 있었던 계기도 산더미 같이 쌓인,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자료들을 `나라도 정리해보자'라고 생각해서 출발했거든요. 18년 동안 묵묵히 자료정리를 성실하게 하다보니 전문가가 됐습니다. 어떤 일이든 한 우물을 올곧게 파고들면서 충실하게 신념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그게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첫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선조들, 특히 관직에 나간 유학자들은 `세상의 근심은 내가 제일 먼저 하고, 나의 즐거움은 나중에 한다'는 신조로 사신 분들이 많아요. 지금은 그런 고매한 철학을 가지신 분들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서울대생들은 그런 정신을 좀 유지하고 계승·발전시켜줬으면 좋겠어요.”

 - 자제 분은 어떻게 되세요.

 “딸 아이 하나예요. 미국에서 학부를 나오고 컬럼비아대에서 도시계획 석사과정을 마쳤어요. 지금은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쓰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요.”

 - 위원장님은 지금도 잘 생긴 편이신데, 젊은 시절에 굉장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요.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별로 인기도 없었고 여성과 사귀는 재주가 없었어요. 첫 부임지가 경북대였는데, 대구 출신 동료 교수들이 장가보내야겠다 해서 제자 중에 한 명을 소개시켜줬어요. 그쪽도 고대사를 전공해서 지금은 한림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매일 옛날 이야기하고 지냅니다.(웃음)”

 - 긴 시간 감사합니다.

〈사진·정리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