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호 2010년 9월] 문화 꽁트
기억할 만한 지나침

강미현이라고 했다.
'강미현 동지. 29일 저녁 일곱 시. ○○당 지역모임 필참 바랍니다'라는 메시지. 강, 미, 현, 이라고 소리내어 발음해 보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라고 답신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다.
석 달 전 나는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그리고 번호를 바꾼 후 두어 달 동안 강미현 씨를 찾는 전화, 강미현 씨에게 향하는 문자 메시지를 받아왔다. 처음엔 짜증스러웠다. 번호 변경 사실을 주위에 꼼꼼히 알리지 않은 강미현이라는 자의 무신경에 화가 났다. 그러다가 때때로 궁금해 하고 혹은 점차 만나고 싶기도 했다. 내 테두리, 내 사람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에게 일격을 당했다거나, 혹은 찬바람이 불고 잎잎이 낙엽 지는 가을이거나 혹은 끔찍할 정도로 아무 일이 없는 나른한 퇴근길 같은 때 말이다. 무슨 일엔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에는 "그 여자 전화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쓰팔"하면서 수화기 저편의 낯선 얼굴에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익명성, 개인주의, 군중 속의 고독으로 상징되는 현대 사회가 실은 더 무섭게, 더 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새삼 치를 떨기도 했다가, 철학적이게도 혹은 무속적이게도 혹은 아무런 뜻 없이 내가 언젠가 강미현이지 않았을까, 혹은 내 일부가 강미현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고정적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 미현아.
- 아닙니다. 왜 자꾸 이러세요, 다 아시면서.
- 믿기지가 않아섭니다.
- ….
- 실례지만 혹시 미현이를 아십니까?
- 모릅니다.
- 숨겨주고 계신 거 아니에요?
- 끊겠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한번은 같은 번호가 찍히기에 화도 삭힐 겸, 어떻게 나오나 궁금하기도 하여 가만히 들고 있어 본 적도 있다. 그 남자는 취기 어린 목소리로 "미현이지? 미현이 맞지? 잘못 걸었다고 남자 목소리로 둘러댈 건 또 뭐야? 일단 만나자, 만나서 얘기 해!"하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나는 순간, 강미현 그녀는 과연 한 남자를 이토록 집착하게 할 만한 매력을 지닌 여자인가, 천박한 호기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생일 축하 메시지, 진보 성향의 ○○당 지역 모임을 알리는 메시지, '가을바람 부네, 계절은 어김없구나. 너는 무탈한지…' 같은 애매한 연정을 담은 메시지, 혹은 그녀의 취향을 알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광고메시지 등이 날아들었다. 그 메시지들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미혼의, 혹은 결혼했다가 돌아온 ○○당 당원이고, 애인 혹은 일방적으로 구애 중인 남자가 있으며, 대리 운전을 이용한 적이 있는 자가운전자이다. 대출 경력이 있으며, N홈쇼핑에 회원 가입이 돼 있고, K생명 김모 FP로부터 몇 개의 보험 상품을 가입한 적이 있다. ○○투어의 여행 상품을 이용한 적이 있거나 혹은 이용하려고 회원가입만 했으며, H건강식품업체로부터 흑마늘 액기스를 구입한 적이 있다. 휴대폰 번호가 변경된 사실을 널리, 또한 신속히 알리지 않는 무심한 성격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고의로 잠적해버린 사람이다. 여러 정황 상 아무래도 잠적해버렸다는 판단이 옳을 듯하다.
특별하달 것 없는 퇴근길이었다. 딱히 통한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입사 동기라는 이유로 퇴근 후에 가끔 뭉치는 동기 녀석에게 지나가는 말로 그녀의 얘기를 꺼냈다. 그 무렵 나는 그녀에게 향하는 문자메시지가 하나도 오지 않은 채 하루가 접히면 야릇하게도 다소 서운하게 여겨지곤 했었다.
- 내 휴대폰 번호를 예전에 쓰던 여자가 강미현이라는 미혼녀야.
-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보기라도 하려구?
쓰윽 닦으며 녀석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 아니. 너는 생각하는 게 항상 그런 식이지.
- 그럼?
- 그냥. 문자 몇 개 받고, 웬 남자하고 통화 몇 번 했는데 그 여자랑 많은 걸 공유하는 느낌이야. 그저… 뭐 야릇하다고나 할까. 원래 알았던 사람 같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21세기에, 이 디지털시대에 낯선 사람에게 흔적 남기기라니 말이야.
- 전화해보지 그래?
- 너 바보냐. 예전에 쓰던 번호를 안다고 그 여자 지금 번호를 어떻게 알아내?
- 휴대전화를 없앴나?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나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야. 미혼녀의 잠적이라….
- 됐어. 너한테 이런 고차원적인 고민 털어놓는 내가 바보지.
그렇게 술을 홀짝이며 실없는 얘기를 할 때에도 나는 자주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휴대폰 소지를 꺼리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휴대폰이라는 편리하고도 끔찍한 감옥을 통해 현대인은 호출 받지 못함을 끊임없이 호출 받고 있다고. 나는 때때로 잠잠한 휴대폰 액정을 무심히 들여다보며 이중의 호출을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강미현에게로 또 나에게로, '너는 호출 받지 못하는 존재야'라는 쓸쓸한 호출을.
그녀의 일을 겪고 나서 나는 휴대폰을 없애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저 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정도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불편을 감수할 만한 굳은 심지도, 남의 신기한 이목과 뜻 없는 관심을 덤덤히 받아낼 배포도, 혹은 뚜렷한 반문명의 철학도, 죽도 밥도 없었던 것이다. 흔적 남기지 않기란 그저 몇 통의 전화 통지를 말한다. 나는 카드회사, 자주 찾는 인터넷사이트, 거래 은행, 일 년에 서너 번 통화하는 애매한 지인들 등에 꼼꼼히 번호 변경을 알렸다. 그러나 무심히 SMS 쇼핑정보 제공에 '동의함'으로 클릭한, 기억할 수도 없는 수많은 인터넷사이트까지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군가 내 번호를 바로 받았다면 본의 아니게도 그에게 너저분하게 내 흔적을 남기는 꼴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참으로 너저분한 일이다.
사진첩에나 나올 만한, 쾌청하고 바람 많은 가을날, 토요일이었다. 약속도 없었고, 휴일 연장근무도 없었고, 하다못해 밀린 세탁거리도 없었다. 나는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청승맞게도 혼자 남산에 올랐다. 출발할 때는 처량한 기분이었으나 맑은 바람을 쏘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나는 듯도 했다. 무슨 마음에선지 나는 기념품 가게에서 자물통과 열쇠를 사서는 정상에 있는 철제 울타리에 자물통을 채웠다. 철제 울타리를 꼼꼼히 메운 언약들. 전망이 좋은 곳의 울타리는 수많은 자물쇠 꾸러미들로 꽤 뚱뚱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맹세 위에 다시 맹세를 채워 넣은 사람들. 혹은 이미 녹슬어버린 언약들. 때때로 지금은 지키고 있지 못할, 혹은 아득한 망각 속으로 숨어들었을 스무 살의 맹세들. 연인 몇몇이 울타리의 빈 공간을 찬찬히 살피며 자물쇠를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혼자 그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나밖에 없었다. 나는 자물통에다가 '강미현 ♡ 김준우, ○○당과 함께 영원하자'라고 꼼꼼히 써넣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거였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남들이 하는 대로 풀숲을 향해 자물통을 채운 열쇠를 힘껏 던졌다. 희미하게 챙, 하는 소리가 들렸고, 어쩐지 그 소리는 내 휴대폰 벨소리를 닮아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이 자물통을 본다면 '○○당'이라는, 지지도 10% 미만의 진보 성향의 정당 이름 때문에라도 한 번 다시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좀 더 특이한 것이었다면 조금은 더 오래 내 이름을 응시할 터였을 텐데… 하는 야릇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녀에 관한 내 기억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 그 이후로도 몇 개의 의미 없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을 뿐. 그리고 '그 남자'의 전화는 거의 뜸해져갔다. 그나마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음성'이다. 남산에 그녀의 이름을 걸어두고 내려온 지 열흘쯤 후, 어떤 여인의 음성이 내 휴대폰에 날아들었던 것이다. '미현아, 내가 다 잘못했어. 우리 전화하면서 풀자. 이렇게 연락을 뚝 끊어버리니까 정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당산동엔 아직 살고 있니? 어제 열 시 반까지 기다리다 왔는데 불도 꺼져있고 인기척도 없더구나. 미현아, 정말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연락 좀 줘.'
그녀는 받을 빚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가족과 의절이라도 하였는가. 아니면 그녀는 동성애자란 말인가. '음성'이 남기는 기억은 강렬하다. 나는 마치 그녀가 강미현이라도 되는 양, 여러 차례 음성 메시지를 반복해서 재생시키며 그 음색에서 느껴지는 피로, 사이사이에 섞여드는 얕은 한숨 소리, 감지되는 대략의 연령대나 희미한 사투리 억양 등을 느껴보았다. 양성애자인 그녀가, '그 남자'와 '이 여자' 사이의 줄다리기에 염증을 느끼고 둘 모두에게 연락을 끊어버린 것일까. 혹은 온갖 민사소송이 흔히 그러하듯 결국은 명쾌하게도 돈 문제인가. 가족과 무슨 일론가 된통 다투고 나서, 자신의 결정이 옳았는지 오래 곱씹어보면서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애증에 괴로워하며 숨어있는가, 그도 저도 아닌 다만 삶의 피로인가….
강미현, 그녀는 내게 ○○당, K생명보험, 대리운전, N홈쇼핑, ○○투어 등으로 남아있다. 혹은 좀 더 나아간다 할지라도 미혼녀가 잠적할 수 있는 몇 가지 보편적인 이유로 남아있다. 내가 짐작하는 이유를 벗어나는, 그녀의 내밀한 사연과 가슴앓이는 영원히 내게는 가려져 있다. 심지어 오늘 퇴근길, 광화문 거리에서 툭 부딪쳤을지도 모를 그녀의 어깨, 오목조목할지도 모를 이목구비조차도.
그녀는 왜 자기 번호를 버렸을까. 당원들에게도, 애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시간은 무심히 덧쌓여갔다. 더 이상 아무런 전화도, 문자메시지도 오지 않게 되자 나는 내 몸의 일부를 망실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휴대폰이 울릴 때 가끔 그녀를 생각하겠지만 그 횟수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고, '미현'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때때로 희미하게 그녀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부질없는 나의 신경증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녀를 원하는 아무런 음성도, 글도 도착하지 않게 되자 내 몸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와 더불어 나 역시 급속도로 잊혀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 얼마 후, 나 역시 홀연히 그 번호를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