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호 2010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李 熙 範 한국경영자총협회장
"나는 취중에 한 얘기라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집사람은 '아, 이러다가 남편을 잃겠구나' 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합디다. 그래서 애들은 셋이나 되는데 나라도 먹고 살아야겠다 해서 학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렇게 시작한 음악학원은 李회장이 산업자원부 장관을 할 때도, 무역협회장을 할 때도 그냥 했다.
"작년까지 했죠. 제가 장관이 된 다음에 집사람이 어찌하오리까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계속 해라. 나는 임시직이고 당신은 영구직이니 당신이 계속 학원하면 내가 나중에 봉고차도 몰아주고 학원 셔터도 내려주마' 했습니다. 뭐, 장관 출신 '봉고맨' 얼마나 좋습니까."
그랬다. 그렇게 '오픈 마인드'를 가진 李회장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서로 모셔다가 일을 맡기지 못해서 안달복달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기업은 마음의 고향 … STX 선택
경총 회장 자리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2월 무역협회장에서 물러났을 때 정치권의 오퍼도 적지 않았고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도 영입 제의가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딱히 오너하고 인연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아직은 신생그룹 축에 드는 STX그룹을 택했다.
"저는 다른 사람과 다른 게 이공계(전자공학과)를 나와서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생활을 쭉 하는 동안 친구들은 대부분 기업에 갔어요. 저보다 생활도 윤택했죠. 저는 공직에 있으니까 차관보때까지 동창회 모임에 가서 회비낼 때 되면 '너는 열외' 그래요. 회비 1∼2만원 내는 자리에서도 '열외'시키고…. 기분이 딱히 나쁜 건 아닌데 한편으로 내가 언제까지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공계 출신이라서 마음 속으로는 언제고 꼭 기업에 가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차관을 그만두고 나올 때 기업을 가겠다고 선언을 했죠. 그때 기업을 가겠다고 하니 오퍼가 많았습니다. 공무원 때보다 훨씬 조건도 좋았어요. 그런데 산업자원부 차관 출신으로는 기업에 못 가게 돼있어요. 공직자윤리법이 딱 막고 있었어요. 그래서 생산성본부 회장으로 갔죠. 생산성본부에서 1년 있는 동안에, 서울산업대 교수들이 대학 총장으로 오라고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거절했죠. '나는 학위도 없고 장관 출신도 아니다. 대학가서 내가 뭘 하냐' 그랬죠. 그런데 교수들이 처음엔 10명 정도 오더니 다음에는 20명 넘게 와서 '예스' 안 하면 안 가겠다고 버티면서 자기네들이 돈 걷어서 무슨 추대위원회도 만들고 그러더라고요.
서울산업대 자리가 예전에 서울공대 기숙사가 있던 곳이고 배우던 곳이라 수락을 했죠. 학교로 가서 8개월 있었죠. 그 때 갑자기 장관으로 가게 돼서…. 사전에 일체 통보가 없어서 저도 방송보고 장관 발령 사실을 알았습니다. 장관 2년3개월 가까이 했는데 이제 기업은 또 못 가는 거고, 학교 몇 군데서 오라고 해서 가려고 했어요. 그러다 마침 무역협회장 자리가 비어서 갔죠. 무역협회 가면서 '3년만, 공직자 윤리법 시한만 지나면 마음의 고향(기업)으로 가리라' 마음먹었죠. 윤리법이 해소되고 무역협회장 임기가 끝나면서 연임 이야기가 나왔지만, 원래 마음먹은 대로 가겠다 해서 STX로 왔죠. STX가 비교적 빨리 성장하는 그룹이고 또 비교적 다른 어디보다 벽이 없습니다. 또 여기는 매출의 90%가 해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해외 네트워크가 아주 중요해요. 저의 해외 네트워크를 좀 이용하는 게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쟁쟁한 대기업들을 마다하고 STX를 택했을 때 외부에서는 대부분 姜德壽회장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런 것은 전혀 없고요. 지금 보신대로 여기서는 현업을 직접 하잖아요. STX보다 더 크거나 더 안정된 기업으로 갔으면 기껏해야 '고문' 정도 맡아서 제 역할에 한계가 많았을 거예요. STX는 姜회장이 오너인데도 직접 영업을 하러 다니거든요. 오히려 제가 갖고 있는 네트워크를 조금만 더하면 다른 어디보다도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STX에 온 후 1년 반 동안 이라크도 가고 아프리카도 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주 전쟁을 펼쳤습니다."
STX그룹으로 옮긴지 1년6개월 남짓 됐을 때 이번에는 경총에서 李회장에게 'SOS'를 쳤다. 경총은 다른 대안도 없이 무조건 李회장만을 고집했다. 복수노조, 타임오프, 대중소기업 상생 등 민감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경영자 계층을 대표해서 원만하게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꼽힌 덕분이다. 경제5단체장 가운데 무역협회와 경총, 두 곳의 수장을 맡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진짜 경총 회장 자리는 맡을 때가 아니라고 봤어요. 아직 STX도 다 파악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그래도 지금이 한국 노사관계의 터닝포인트가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까 계속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힘든 일을 계속 해야 되는 사주팔자인가 보다 생각합니다."
李熙範회장의 가장 큰 덕목은 '일도 무서워하지 않지만 맡은 일 이상으로 항상 해낸다'는 점일 것이다. 기왕 경총 회장직을 맡은 지금 각오와 포부가 궁금했다.
"산업평화는 기업경쟁력은 물론 국가경쟁력의 핵심요소입니다. IMD나 WEF 등의 국가경쟁력 조사에서 한국은 IT나 교육 등은 우수한 성적을 내면서도 노사관계에서는 항상 거의 꼴찌를 차지할 정도로 성적이 안 좋습니다. 특히 요즘 노사문제는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금지와 근로시간 면제제도 도입, 복수노조 시행 등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상생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는 만큼 노사문제도 서로 한발씩 양보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또 그만큼의 역할을 해야겠지요. 현대ㆍ기아차그룹이 지난해말 경총에서 탈퇴했는데 경총이 기업이 필요한 일을 위해 제 역할을 한다면 다시 가입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주변국들에 비해 너무 높은 임금, 그러면서도 낮은 생산성은 한국 경제가 한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꼭 풀어야할 숙제다. 李회장의 복안은 뭘까.
"인재 많아 미래 걱정 없어요"
"제가 해외에 많이 다니면서 외국의 장관들을 많이 만납니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몽골…. 각 국의 장관을 만나 제가 공무원 출신이고 70년대 초반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하는데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 정말 엄청나게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1964년도에 1억달러를 수출했는데, 그때 가나, 에티오피아와 똑같이 1억달러 수출 테이프를 끊었던 나라입니다. 우리가 지금 4천억달러를 수출하는데 그 나라들은 아직도 30억∼40억달러를 수출하거든요. 그래서 경제발전의 경험을 나누겠다고 하면 굉장히 호감을 갖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문제들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난 60∼70년대 섬유공업에서 시작할 때 조선,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할거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우리나라는 가장 중요한 인재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다음 세대에도 얼마든지 세계 시장 제패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난 1988년에 민주화를 선언하면서 불과 3년 동안 임금이 3∼4배 뛰었거든요. 섬유, 완구, 신발 산업이 다 해외로 나가 우리 산업이 공동화 됐다고 걱정들이 많았지만 반도체를 찾아내고 핸드폰을 찾아내고, 칼라TV를 잃는 대신에 LCD TV를 찾아내고 조선산업도 세계 1위가 되고 그랬잖습니까. STX만 보더라도 유조선을 만들고 크루즈선을 만들고 앞으로 부가가치가 더 높은 제품들로 나갈 겁니다. 제가 직접 맡고 있는 STX에너지는 특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석유, 가스, 철광석, 석탄 등 자원개발에 나서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잘 될 겁니다. 걱정 없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긍정적인 전망에 절로 힘이 났다. 李회장의 남다른 일복에 이 같은 '긍정의 힘'도 한 몫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얘기를 하다보니 최근 끝난 인사청문회가 화제에 올랐다. 총리 후보자나 장관 후보자들이 위장전입, 투기의혹, 공적 인력의 사적 사용 등 각종 구설수 끝에 낙마한 일은 李회장에게도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킨 듯 했다. 특히 청백리가 칭송 받던 과거와 달리 모든 사람들이 '명예보다 돈'을 좇는 지금 공직자로서 흠결없이 지내는 과정에서 유혹도 적지 않았을 듯 했다.
"저도 유혹이 많았죠. 제가 사실 사무관으로 들어가서 차관까지 고속승진 했잖아요. 장관을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없지 않았었는데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긴 제도가 '쌍피제도' 였어요. 같은 지역 출신이나 같은 학교끼리는 장ㆍ차관 함께 안 시킨다, 같은 고향끼리 안 시킨다는 뭐 그런 제도가 있었거든요. 그때 辛國煥장관이 오셨는데, 그 분이 충남 예천 분이세요. 고향이 저의 옆동네라고 해서 그 기준으로 제가 차관직을 그만두게 됐다고 그래요. 그래서 일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분당 율동공원 식당에서 오랜만에 점심이나 먹자고 데려갔는데 애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아빠 무슨 일 났어? 일요일에 출근도 안하고 갑자기 왜 안 하던 행동을 하세요' 그러는 거예요. 10년 전이니까 막내가 한 스무 살 정도 됐을 때였는데 아무튼 거기서 비빔밥을 먹고 나서 제 딴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제 아빠가 공무원을 그만두려고 해' 하고 말을 꺼냈더니 세 아이들이 용수철 튀듯이 펄쩍 뛰면서 '아빠 잘했어, 잘했어' 그러더라고요.
청와대서 행정업무 많이 배워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얼마나 애들한테 해준 게 없으면 애들이 그렇게 좋아할까 싶더라고요. 보통은 '그럼, 우리 내일부터 뭐 먹고살아?' 뭐 이런 거 물어보잖아요. 근데 온 식구가 다들 '잘했어, 잘했어' 그러는 거예요. '내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죄를 참 많이 지었구나' 생각했어요. '이제부터는 정말 새 길을 가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곤 집에 와서 이임사를 썼어요. 과천 땅에는 가급적 다시 오지 않으리라 하고 이임사를 썼지요.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에 다시 잡혀갔지만(웃음). 이번에 청문회를 보면서 사실 장관, 총리 후보자로 나오신 분들,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분들이잖아요. 일반적인 잣대로 보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은 분들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공직이라는 직책에 정말 대단히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는구나 그런 걸 느꼈어요. 저도 공직에 있을 때 매번 재산 등록하고 그럴 때 아이들 명의의 예금통장에 얼마가 있고 집에 보석이 뭐 있고 다 써냈는데요. 심지어 짓궂은 친구들은 관보를 보고 '야, 관보에 보니까 너희 아이 통장에 몇 백 만원 있던데 오늘 저녁에 술이나 먹자' 그러기도 했어요. 공직자는 어항 속의 붕어처럼 투명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범적인 선비상으로 황희 정승 얘기를 하는데 황희 정승도 요즘 같으면 청문회 통과 못했을 거예요(웃음). 공직에 있으려면 시대가 요구하는 청렴성은 기본이겠지요."
하지만 요즘 세상은 공직자들이 청렴만을 추구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공직에 있더라도 부모의 재력이 받쳐줘야 공직에 오래 있을 수 있다는 뼈 섞인 농담도 곧잘 나온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 갖지는 못하도록 한 거 아닙니까. 그걸 다 갖는 것이 일반 잣대로 보면, 정당하게 했다면 모르지만, 짧은 산업화 역사 속에서 국민들이 보는 잣대가 좀 더 엄격할 수도 있죠."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민주화 이슈가 워낙 컸고 데모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돈보다 명예'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요즘 후배들은 먹고사는데 워낙 치여서 그런지 단기간에 '대박'을 치겠다, 혹은 돈 많이 주는 직장,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공직과 기업을 두루 거친 학교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참 많을 듯 했다.
"지금 후배들더러 저처럼 일하라고 하면 다들 기절초풍할 거예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히, 성심 성의껏, 성실하게 일하는 거예요. 저는 제일 기억나는 날 중에 하나가 지난 1979년 12월 24일인데요. 그때가 朴正熙대통령이 돌아가시고 큰 혼란기였습니다. 朴대통령 때부터 무역진흥 확대 담당 사무관을 맡고 있었는데 그 날은 별일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집에 일찍 가서 애들 얼굴 좀 보겠다고 해서 케이크 사서 책상에 놔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과장이 오더니 '비상, 오늘 밤 야근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때부터 밤 새워 야근을 내리 한 끝에 1980년 1월 1일 崔圭夏대통령 취임 후 첫 번째 업무로 무역진흥 확대회의를 했습니다. 일일이 붓으로 안건을 고치고 호텔비가 없으니까 나중에는 직원들 집에 데려가서 원고를 쓰고 차트를 만들고 그랬죠. 그 일을 全斗煥대통령 때까지 했습니다. 일 잘한다고 소문이 많이 났죠. 全斗煥대통령 때 청와대 사정 비서실에서 징집해서 1년 정도 가 있기도 했어요. 고생을 무지했지만, 행정의 꽃은 대통령 주재 회의잖아요, 대통령 주재 회의를 하면서, 안건을 만들고 프로토콜하는 거, 참석자 연락하는 거부터…. 거기서 행정업무를 참 많이 배웠다고 생각해요. 공직에 있을 때는 토요일, 일요일에 쉬어본 기억이 없어요. 제가 최근에 서울대 경영대학에 가서 강연하라고 해서 그랬어요. '여러분은 사회에 나가서 성공할 수 있는 필요조건은 갖췄습니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미결로 남았습니다. 나머지 반의 충분조건은 성실성입니다.'
입사할 때 학연, 지연이 도움될 지 모르지만, 완전경쟁에서는 성실성이 좌우합니다. '남보다 5분 일찍 출근해서 5분 늦게 퇴근해라. 10년 만 해라' 실제로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남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고. 며칠 밤샘도 하고. 그게 생산적이었느냐는 별개 문제고. 저 나름대로 로열티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묵묵히 성실한 자세로 일하면 윗사람에게 인정받게 되고 더 많은 기회가 오게 돼있어요."
李회장의 또 다른 덕목은 남다른 인맥과 친화력이다. 그의 신조는 '한사람의 벗을 잃더라도 한 명의 적을 얻지는 말자'는 것이다. 李회장은 "易地思之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하면 아무리 미운 사람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이 같은 오픈 마인드로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인적네트워크를 쌓아왔으니 인맥이 가히 '산맥' 수준일 터.
"물론 저는 비교적 사람을 많이 만났죠. 자리가 그래서 많이 만난 측면도 있고요. 그런데 의외로 '너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 할 때 혼돈스러울 때가 많아요. 시간 남을 때 편하게 전화하고 농담 따먹고 술 한 잔 하고 그렇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누굴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힘있는 자리,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진짜 바쁘고 사람도 많이 찾아오고 그러지만 공직을 그만두면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볼 때가 있어요. 실제로 공직을 그만두고, 어느 날인가 휴대폰이 토요일, 일요일에 한 통도 안 울리는 거예요. 차관보 때까지 매주 토, 일 사무실 나가고 1분에 한 통 꼴로 전화가 왔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안 오니까 이상하더라고요. 내가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고…. 저는 오히려 토요일, 일요일 전화가 많이 오고 일 끝나고 난 다음에 상가 두어 군데 다니고, 그래서 상가에 가서 소주 마시고 집에 12시에 들어 갈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나중에 대학서 강의하고 싶어"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인 李회장은 경총 회장 이후, 혹은 STX이후의 인생 설계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무역협회에 있을 때만 해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았어요. 혈압도 있고. 지난 1년 동안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경총 회장을 안 맡으려고 한 것도 건강상 이유도 있었어요. 과로는 별로 저에게 맞질 않아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팔자려니 해야지(웃음). 집사람이랑 그런 얘기는 해요. 직장 다 다니고 나면 뭐 할거냐. 그러면 제가 그래요. '우리 창업하자. 둘이서 통닭집이라도 하자' 집사람이 유치원이나 학원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봉고차를 운전할 거예요. 그거 안 하면 정식 교수는 아니더라도 시간강사를 할 용의는 얼마든지 있어요. 생산성본부에 있을 때 호서대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했었는데, 한 학기 동안 16개 코스를 하도록 시놉시스까지 다 만들었어요. 노트정리도 다 돼있고요. 조금만 보완하면 한번에 3시간씩 한 학기 강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은 STX그룹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시키는 일, 건전하고 생산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해 한국의 산업을 선진국 이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일, 이 두 가지에 전념해야죠."
李熙範회장다운 집중력이자 마무리였다.
<사진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