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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2010년 6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한국 기업의 약진' 덕분





 "밖(외국)에 나가보면 애국자가 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애국심'은 과거 한국을 모르거나 한국을 무시하는 외국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민족감정'이 아니라 반대로 자부심이다. 한국을 칭찬하고 한국 기업이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서 내 나라가 이렇게 컸나, 한국 사람인 게 정말 자랑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무엇보다 '한국 기업의 약진' 덕분이다.

 생전 처음 러시아에 가볼 기회가 있어 5월 중순 2주간 모스크바, 성 페테르스부르크, 카잔, 칼루가 등 주요 도시를 돌았다. 공항에서부터 식당, 호텔 등 가는 곳마다 만난 것이 '삼성' 'LG' TVㆍ컴퓨터ㆍ휴대폰이었다. 신흥 러시아 부자들의 근사한 수입차들 사이에 현대ㆍ기아자동차도 눈에 많이 띄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 출장길에 주요 도시 호텔이나 거리에서 만난 게 '소니' 텔레비전이요, 도요타ㆍ폭스바겐이었다. 그때마다 선진국의 저력을 새삼 느끼곤 했는데 이제 삼성과 LG, 현대차가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으니 '애국심'을 넘어 '문화적 충격'으로까지 다가왔다.

 푸틴 총리를 비롯해 메드베네프 대통령까지 배출한 러시아의 최고 명문 성 페테르스부르크대학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총장도 한국 예찬론자였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이끌어갈 인재를 배출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교육이념을 밝힌 그는 "위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한국이야말로 배울 것이 많은 나라"라고 칭찬했다. 그는 "특히 어려울 때 함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무섭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러시아로서는 부러울 뿐"이라고도 했다. 나라 안에 있을 때에는 '분열된 모습'에 넌더리를 낸 필자 입장에서 막상 밖의 사람들 입에서 "한국이 뭉치고 있다"고 들으니 새삼 기운이 났다. 유서 깊은 이 학교 도서관의 컴퓨터는 LG였고 복사기는 신도리코였다.

 모스크바에서 1백여㎞ 떨어진 칼루가는 아예 한국을 롤 모델로 산업단지를 구성하고 있었다. 세계 첫 상용 원전을 가동시킨 오브닌스크가 있어 과학 도시의 명성을 구가하고 있다가 사회주의의 멸망과 함께 급전직하한 칼루가는 이후 '살 길'을 모색하다 한국식 발전모델에서 길을 찾았다고 한다. 자원은 없으면서 교육과 인재양성을 통해 글로벌 기업을 가진 나라로 우뚝 선 한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그들은 혈안이 돼 있었다. 2008년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할 때 평균 2년 걸리는 단지 조성을 6개월 만에 해결해줄 정도로 유치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9박10일 짧게 훑어본 러시아는 비록 영광은 빛바랬을지언정 제국의 풍모를 갖춘 나라였다. 땅은 넓었고 문화유산은 찬란했다. 한 때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우리 운명을 쥐락펴락했던 나라가 이제는 우리로부터 배우겠다고 나섰으니 삶이나 국가나 흥망성쇠라는 사이클을 거부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우리도 지금 잘 나가간다고 우쭐댈 일이 아니란 생각에 자부심 한 켠에 무거운 책임감도 들었던 러시아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