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호 2010년 4월] 문화 꽁트
99%의 블루제이를 위해
미국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는 사람이 아닌 새였다. 말도 안 통하고 타고 나갈 차도 없어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켓에 음료수를 사러 가던 길이었다. 넓은 잔디밭에 가로놓인 좁다란 아스팔트길을 걸어가는 동안 뭔가 잠시 나의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잔디밭길이 끝나고 기찻길 옆 덤불이 늘어선 길로 접어들 무렵에야 그 겁 많은 스토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흰색, 하늘색, 연한 파랑, 연보라색으로 이뤄진 깃털에 간간이 까만 선으로 포인트를 준, 세련된 빛깔의 새였다. 그 새의 이름이 '블루제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에 버드와처인 과 친구 케이시에게서 작은 도감을 얻은 후였다. 내가 블루제이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을 때, 케이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새의 진짜 깃털 색을 당신이 몰라서 하는 소리야. 잠시 햇빛을 받을 때만 빛을 반사해서 그런 색깔을 낼 뿐, 비 오고 흐린 날이나 어둠 속에 있을 때 그 새의 색깔은 어두운 회색이지. 게다가 다른 새의 둥지에서 알을 훔쳐먹는 야비한 새라고. 몰래 매 울음소리를 흉내내서 다른 새들이 다 도망치고 나면 그때 딴 새들의 둥지를 덮치는 거지.
차라리 카디널을 좋아하는 게 어때? 새빨간 색깔이 아름다운 데다, 부부금슬이 좋아 늘 함께 다니고, 울음소리도 특출 나게 아름답거든. 잘 들어봐. 맑고 낭랑한 음색으로 '아임 프리티 프리티 프리티∼'라고 노래하지. 좀 오만한 감은 있지만 예쁜 건 사실이잖아."
케이시의 가르침 덕분에 카디널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게 됐다. 심심할 때면 아파트 주변의 잔디밭과 숲을 산책하면서 카디널과 블루제이 찾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덩그러니 홀로 선 전나무 옆을 지나다 카디널 울음소리를 들었다. '암 프리티 프리티 프리티… 암 프리티 프리티 프리티….' 노래하듯 선명한 멜로디가 있는 그 소리는 분명히 카디널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나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속에 숨어 노래하던 새는 의외로 카디널이 아닌 블루제이였다. 가장 높은 음을 내야 하는 첫 번째 '프리티'를 할 때는 성악가처럼 가슴과 고개를 높이 쳐들며 반동을 줬다. 다른 새의 소리를 여러 가지로 흉내내는 새는 '모킹버드'이고, 블루제이가 흉내낼 수 있는 건 오로지 매뿐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블루제이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주변에 다른 나무도 새도 없는 곳에서 하필이면 카디널 소리를 흉내내다니.
평소 화려하던 모습의 유코가 화장기 하나 없는 부스스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쓰고 운동복 차림으로 내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국에 있을 내 한국 지인들의 명단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은 같은 동양인이 봐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유코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정작 그녀와 닮은 한국친구 대신 블루제이를 떠올렸다.
"밖에 눈이 오잖아요. 기온이 낮은데 하늘은 맑고, 저 멀리 걸친 구름이 눈가루를 바람에 실어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작은 눈의 입자가 결정 모양 그대로 햇빛을 반사하며 휘날리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반짝반짝 거리죠? 저걸 보니 갑자기 코끝에 구수한 커피 향이 떠올라서요. 그런데 커피가 마침 다 떨어졌지 뭐예요."
유코는 복도를 중심으로 나의 맞은 편 집에 사는 드라마스쿨 대학원생이다. 아파트 오리엔테이션에서 잠시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눴을 뿐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고서 어지러진 거실을 대충 치웠다. 유코는 아무 말 없이 창가로 걸어가 햇빛을 반사하며 내리는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동향집이 더 뷰가 좋네요. 일출이 아름답겠어요. 우리집은 서향이라 석양은 좋은데, 오전에 이 집처럼 햇빛이 잘 들지는 않아서 훨씬 추워요. 저렇게 내리는 눈을 보면 차르르르 차르르르… 하는 금속성의 효과음을 넣어주고 싶어요. 아주 작은 핸드벨이 내는 높고 낭랑한 소리처럼요."
보아하니 아침도 안 먹은 것 같아 마침 내가 먹으려고 오븐에서 구워둔 고구마를 꺼내고, 빈티지 이탈리안 에스프레소 머신에 커피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미니 도자기 주전자에 우유를 넣어서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웠다. 커피가 끓어오르는 동안 살짝 데운 우유를 거품기로 빠르게 휘젓기 시작했다. 까페에서 기계로 만드는 거품처럼 발이 가늘지는 않지만, 커피와 어우러질 때 그냥 우유보다는 훨씬 고소한 맛을 낸다.
유코도 단순히 커피를 빌리러 온 건 아닌 듯 싶었다. 내가 커피를 끓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 나는 설탕을 타지 않고, 우유거품만 부은 커피를 식탁에 놓았다. 유코는 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커피 향기에 홀린 듯이 식탁으로 뛰어왔다. 은박호일을 벗기고 두 손으로 부러뜨리자 김이 솔솔 나는 고구마가 구수한 향기와 함께 노오란 속을 드러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보기만 해도 행복해요. 아, 이렇게 아름다운 날 홈메이드 까페라떼에 군고구마라니! 지인 씨는 천재예요. 맛도 끝내주네요. 멋진 궁합이네요. 고구마의 단맛이 커피의 쓴맛을 중화시키고, 고소한 맛을 증가시키네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커피의 쓴맛이 고구마의 지나친 단맛을 씻어가 주네요! 오 행복해라. 세상은 살만해요. 세상은 살만해요."
유코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고구마와 커피에 코를 가져다 대고 향기를 맡았다. 고구마와 커피를 입보다는 코로 먹는 것 같아 보였다. 유코의 찬사는 듣기 좋았다. 맛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요리처럼 재미없는 게 있을까. 군고구마 한 조각, 커피 한 잔에 세상은 살만하다고 외치는 이 사람,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가까이서 보니 머리뿌리 쪽에 흰머리들이 꽤 많이 올라온 것이 젊게 보이려고 검은색으로 염색한 모양이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는 기미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지인 씨, 오늘 은혜 잊지 않을게요. 담번에는 저희 집에 와서 같이 와인 마셔요. 제가 사실 잠시 와인 공부를 하려고 프랑스 보르도에 간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와인을 약간은 알아요."
왜 소믈리에가 되지 않았냐고 묻자 유코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혀와 코가 발달해서 와인 소믈리에가 될 자질은 충분했죠. 문제는, 너무 빨리 취해버린다는 것. 다른 술은 좀 세다고 자부했는데, 이상하게도 하우스와인에는 약해서. 취해버리면 입이 얼얼해지면서 그 맛이 그 맛 같고, 향기도 잘 구분할 수 없거든요. 뜨거운 햇볕 아래서 포도 기르기, 포도 따기, 품종이랑 토양 공부한 것이 다 소용없었죠. 결국 짐을 싸서 일본으로 돌아갔어요.
사실 소믈리에 공부를 결심하기 전까지는 동경에서 5년간 전문상담가로 일했었어요. 주로 문제가정 상담을 많이 했는데, 남편한테 매맞고 목에 칼자국 생긴 여자들을 5년간 다루다보니 제가 우울해서 죽을 것 같더라고요. 상담가는 냉정해야 하는데, 꿈을 꾸면 내가 그 여자들이 돼있고, 거리에 걸어다니는 남자들이 이중인격자들로만 보이고…, 그 직업에 너무 빠져버렸던 거죠.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웃겨요.
보르도에서 돌아온 후 오랜 남자친구랑 결혼을 했고, 한동안 착실한 전업주부로 지냈는데 아이가 안 생겨서 심심하더군요. 그래서 동네 문화센터에서 재미로 연극을 배우다가 재능을 인정받아 지역 극단에서까지 일하게 됐어요. 전업배우가 된 거죠. 이번엔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극중 상대 배역의 남자에게 빠져버렸죠. 나보다 한참 어린 유부남이었는데, 나의 역할을 사랑하는 그에게서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발견한 거죠. 결국 주변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남편에게는 이혼 당하고…, 모든 인연의 고리를 끊고 싶어서 이곳 드라마스쿨에 지원해서 도망쳐 온 거죠. 나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랄까…."
유코는 비어버린 커피 잔을 아쉬운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고구마는 더 남았지만, 고구마가 이미 식은 데다 커피 없는 고구마는 단맛이 너무 강해 싫은 모양이었다.
"이곳에 왔을 때 너무나 우울해서, 이제 내 인생에서 이전과 같이 뭔가에 빠져 행복을 느끼는 일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저 눈과 군고구마와 까페라떼의 완벽한 조합이 '이건 분명 행복이다' 싶은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네요. 저 너무 잘 빠져버리는 사람이죠? 이런 내가 싫은데, 어쩌겠어요? 그래서 더 자주 불행해지지만, 그래서 더 자주 행복해지니."
유코가 돌아간 후 나는 다시 한 번 도감을 펼쳐 블루제이를 찾았다. 그동안 읽지 않았던 하단 박스에 작은 글씨로 이런 설명이 적혀 있었다.
'블루제이가 다른 새의 둥지에서 알을 훔쳐먹는다는 설이 사실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몇몇 과학자가 블루제이의 위장에 든 먹이들을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1%의 블루제이의 위에서만 다른 새의 알 성분이 발견됐다. 99%의 블루제이는 결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