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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호 2010년 4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큰 이야기, 강한 이야기




 문학이 찬밥 신세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취향이 문학작품 읽기였던 사람들 중 상당 부분이 상업영화 쪽으로 넘어갔다. 문학에서 소재와 영감을 구하던 영화가 도리어 문학을 내려다보는 역전 현상이 벌어져 있다. 거시서사가 사라진 문학은 모기 다리에 털이 몇 개인가를 따지는 미시서사로 한없이 졸아들어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읽히는 것이라곤 본격문학을 가장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상업주의 문건들이다.

 소비향락적인 대중문화와 몸을 섞은 문학, 예컨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이 그러한데, 그것의 한국판 아류들이 지금 문학의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문학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평하기를, 그의 소설에는 일본 대신 '미국'이 들어와 있다고, 따라서 그의 소설은 일본어 문학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일본문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기서 '미국'이란 물론 헐리우드식의 사고방식, 소비향락문화를 의미한다.

 이제는 우리 문학이 달라져야겠다. 일상을 절대시하는 편견을 버리자. 일상의 작은 이야기와 함께 진짜 이야기, 큰 이야기, 강한 이야기도 이제는 복권돼야 하겠다. 거시서사는 이미 영화 쪽으로 가버렸다고 탄식하지 말자. 영화의 서사는 대체로 단순해 진실을 제대로 품기 어렵다. 인생사는 영화가 제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직 문학만이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문학만이 진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물질적 가치 대신에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는 일은 오직 문학만이 할 수 있다.

 엔터테인먼트와 쾌속 질주의 배후로 과거의 것들이 급속도로 미끄러지면서 잊혀지고 있다. 시시각각 우리 뒤로 버려지는 수많은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생각해보자. 슬픔도 이제는 과거의 정서가 돼버린 것 같다. 슬픔이 낯설어졌다. 장례식장에도 슬픔은 없다. 슬픔을 아는 자가 진짜 인간일 텐데, 우리는 더 이상 슬픔을 모른다.

 가족과 함께 산골의 한 민박집으로 피서를 갔던 한 도시 소녀가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보고 울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별들을 보고 왠지 눈물이 났어요. 그냥 눈물이 났어요. 그냥 짠했어요." 가슴 뭉클한 그 감정이 낯설고 무섭기도 해서, 얼른 집안으로 도망쳤노라고 했다. 그녀는 자기가 왜 울었는지 까닭을 모른다. 그 슬픔의 정체를 문학이 해명해줘야 한다. 아마도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들이 그 소녀의 존재의 근원에 깊숙이 가 닿았던 모양이다. 그것은 존재의 슬픔이라고, 대자연 속의 극히 작은 한 분자로서의 자신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자신의 순수한 영혼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문학은 그 소녀를 다독거려 안심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순수한 슬픔을 인간은 잊은 지 오래다. 슬픔을 아는 인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이 참된 인간이다. 문학은 그 순수한 슬픔을 일깨워줌으로써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줘야 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부서지기 쉽다. 맹목의 질주 뒤로 아름다운 것들이 수없이 부서져 버려지고 있다. 과거 속에 버려진 아름다운 것들을 복원해내야 한다. 부당하게 폐기된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해명해내는 일을 문학이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살려 천박한 현재를 순화시키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