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호 2010년 3월] 문화 꽁트
오늘의 도시락

미옥은 눈을 떴다. 이상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눈이 쉽게 떠졌고 잠이 싹 달아났다. 눈앞에서 어둠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지나자 그녀는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푸르스름한 빛이 맞은편 벽면에 희미한 실금을 그어놓고 있는 것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남편은 코고는 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 데크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5분이었다. 아직은 한껏 여유를 부려도 좋을 시간이었다. 문득 박하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머릿속이 환해졌다. 행복이란 게 별건가. 남들이 놓친 순간을 꽉 잡는 것, 그럴 때의 짜릿한 맛이 바로 행복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은 대낮 같이 밝은 시간이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틈바구니에 있을 때는 찾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밤중이나 새벽녘, 발이 시린 어둠 속에서 홀로 깨어 있는 시간이 돼야 그 느낌은 찾아오곤 했다.
잠을 잘못 잤나 보았다. 어깻죽지를 관통하는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옥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렇게 깊은 심호흡을 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배꼽 아랫부분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깨에 뭉쳐 있던 근육이 하나 둘 이완되기 시작했다. 문득, 어제 있었던 '순사모' 정기모임의 끄트머리 장면이 떠올랐다.
'순사모'는 삶의 빛나는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순사모' 회원들은 삶의 빛나는 순간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서가 아니라 도약과 일탈에서 찾아온다고 믿고 있었다. 도약과 일탈의 순간, 번뜩 영감이 떠오를 것이고 놀라운 깨달음이 올 것이고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떠질 거였다. 물론 도약 뒤에는 나락이 뒤따르기 마련이었고 일탈은 인생의 파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회원들은 삶의 빛나는 순간을 찾는 데 열성적이었다. 문제는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임은 종종 자정을 넘겨 동이 터 오는 새벽으로 이어지기 일쑤였고 새벽녘이면 저마다 하나씩 삶에 대한 은유를 간직한 채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미옥은 한 때 '순사모'의 열성적인 회원이었지만 결혼한 이후에는 통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제 그녀가 정기모임에 나갔던 것은 그러니까 7년 만의 일이었다.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어."
백 선생은 입술을 깨물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옥이 막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던 참이었다. 10시 50분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임은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모임의 회장인 백 선생은 호주에서 그저께 돌아왔다고 했다. 부부동반 해외여행은 처음이라는 백 선생의 여행담은 회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킹스크로스 거리를 도시락을 끼고 걷다니 말이야."
백 선생의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마저 어렸다.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미옥은 잇대어 붙인 나무 식탁에 빙 둘러앉은 회원들의 다양한 반응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누군가는 키들키들 웃어댔으며 누군가는 혀를 찼다. 도대체 어떤 깨달음이었을까? 미옥은 알 수 없었다. 불퉁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저 먼저 가요."였다. 그녀의 인사말은 백 선생의 여행담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음식점 문을 열고 나갈 때 나무문 위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미옥은 지하철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가슴을 조여왔다. 킹스크로스 거리는 아마도 호주 어딘가에 있는 관광지겠지. 도시락을 끼고 다니는 백 선생의 비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귓가에는 빈 도시락에 수저 달가닥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전광판의 초록 불빛이 막 6시를 알렸다. 미옥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안방에서 나와 더듬더듬 부엌의 전등을 켰다.
준비는 완벽하게 돼 있었다. 자줏빛 얇은 껍질이 탐스러운 고구마와 아삭아삭 속살이 씹히는 토마토는 냉장고 야채박스에 나란히 담겨 있었고 플라스틱 통과 꿀단지 속에는 미숫가루와 꿀이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1ℓ병 속에 반 이상 남아 있는 우유를 확인한 뒤에 미옥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 전기 그릴의 타이머는 5분에 맞춰져 있었다. 예열이 끝나고 나면 고구마를 구울 것이고 도시락 싸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싱크대 위에 꺼내 놓은 두 개의 락앤락 통을 미옥은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변두리에서 건강식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미옥의 남편이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게 된 까닭은 결혼 초에 옆 건물 일층에서 김밥을 사먹고 난 뒤 장염에 걸린 탓이었다. 미옥의 남편은 그날 열일곱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그날 이후 도시락 싸기는 미옥의 일상이 됐다.
처음에는 몹시 두려웠다. 미옥은 마지못해 도시락을 받아들였으며 적응이 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도시락은 '순사모'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반대쪽에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극적 순간도, 눈이 번쩍 떠지는 황홀한 깨달음도 없었다. 말하자면 도시락은 끝없는 되풀이의 세계였다. 파격이나 일탈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옥의 남편은 늘 같은 도시락을 원했다.
도시락 싸기 3년째 되던 어느 날 미옥의 남편은 실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도시락과 마누라의 같은 점이 무엇인지 알아?"
"영양? 정성?"
"아니."
"그럼 경제성인가?"
"특별한 맛이 없어도 계속 먹게 돼 있다는 거야."
미옥으로서는 충격이었다. 도시락만큼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녀는 자신이 만든 도시락에 특별한 맛이 없을 가능성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런 말을 듣고도 도시락을 계속 쌌다는 것이다. 미옥의 남편은 이제 식중독이 아니라 늘어나는 뱃살을 걱정하게 됐다. 미옥은 한 달 전부터 고구마, 토마토, 우유로 이루어진 간소한 메뉴로 바꾸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떠올리면 미옥은 자기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도시락은 어디선가 혼자 밥 먹는 사람의 커다란 등을 떠오르게 했다.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늘 변함없는 그 맛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일상에서 길어 올린 깊고 깊은 맛이었다.
"뭐해? 밥 안 차리고."
남편은 평소보다 서두르는 눈치였다. 잘라놓은 토마토를 락앤락 통에 마저 담은 뒤 미옥은 황급히 뚜껑을 닫았고 곧 아침상을 차렸다.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가 제 방에서 잠이 덜 깬 얼굴로 나왔다. 미옥은 딸아이를 한 번 안아줄 시간도 없었다. 남편이 밥을 먹는 사이에 도시락 가방으로 쓰고 있는 등산용 배낭에 락앤락 통과 우유병을 챙겨 넣었다. 식사를 마친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건 뭐야?"
"뭐긴. 오늘의 도시락."
"오늘 안 싼다고 했던 거 기억 안나? 3박 4일로 국제건강식품 박람회 다녀온다고 했잖아."
"그게 오늘이었어?"
미옥은 보름 전 모처럼 바깥바람 좀 쐬겠다면서 들떠 있던 남편의 표정을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어디서 한다고 했지?"
"방콕. 11시 비행기니까 서둘러야 해."
현관 입구에 초록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우아하고 세련되고 날렵한 느낌을 주는 여행용 가방이었다. 그 안에 도시락이 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미옥은 거울 앞에서 와이셔츠를 매고 있는 남편 앞으로 가서 물었다.
"혹시 호주에 있는 킹스크로스 거리 알아?"
"그럼 잘 알지."
"거기에서 뭐 맛있는 거 팔아?"
순간 남편의 얼굴 위로 야릇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글쎄, 음식은 모르겠고. 거리에서 미녀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지, 아마?"
그럼 백 선생이 끼고 다닌 도시락의 정체는? 미옥의 머릿속으로 퍼뜩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비행기에 기내식이 나오겠지?"
"물론."
"그래도 도시락 가져가."
그렇게 말한 뒤 미옥은 후다닥 부엌으로 갔다. 등산용 가방은 식탁 밑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가방 지퍼를 열면서 미옥은 한 번 더 소리쳤다.
"꼭 가져가야 해."
가방 속에는 락앤락 통과 우윳병 옆으로 약간의 틈이 있었다. 미옥은 팔과 다리를 구부렸다. 굳이 남편에게 백 선생의 비애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가방에서 풍겨 나오는 달달한 고구마 냄새와 상큼한 토마토 향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허리를 접은 채 가방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미옥은 자신이 바로 오늘의 도시락임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