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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호 2004년 6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독어 · 불어 발음 위해 전문가 찾아다녀

金 恩 卿(61년 音大卒)한양대 음대 객원교수
 요즘 한창 뜨는 386세대가 부러워서, 그렇다면 우리 세대는 무어라 대의명분을 내세우면 걸맞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기야 우리 학번은 단기로 표기되었던 구세대니 내세울 것도 없겠다. 한참 대학생활의 여유를 느낄 시절 4 · 19혁명을 겪었고, 데모에 참가했던 친구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한동안 같이 감격하고 동감하며 보냈으니 거창하게 4 · 19세대라고나 할까.  
그 당시 음악대학은 연건동에 위치한 의과대학 뒤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가건물처럼 지어진 본관에 강의실도 연습실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학교 주위가 아늑하고, 가끔 의대 본과생들이 슬그머니 눈을 흘깃거리며 지나는 것 외에는 외부와 고립되어 있어 너무 조용한데다 한쪽으로 수풀이 우거진 고즈넉한 동산도 있어 철 따라 꽃도 피고 지고, 새들도 지저귀었다. 거기에다 각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갖가지 악기의 음의 조화가 그 동산을 가득 메우면서 모두 대가의 꿈에 부풀었던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입학할 당시에는 베레모까지 갖춘 짙은 감색의 교복이 있었다. 물론 서울대 배지도 있었고(등록금에 교복 값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학년 때에는 열심히 입고 다녔는데 점차 쑥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좀더 멋을 내고 싶어서인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땐 한 학년이라야 75명(성악, 기악, 작곡 모두 합쳐서)이 전부였으니,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 그 얼굴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리 학번 동기들은 그전부터 한 달에 한번씩 만나 오고 있다. 며칠전 모임에서는 오랜 만에 서로들 옛 추억을 되살리며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모두들 그때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어렵게 공부했는지 요즘 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거란다. 그 당시에는 악보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쫓아다니며 빌려온 악보를 새로 종이에 옮기느라(일명 사보하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어떤 남학생은 환심작전으로 사보를 열심히 대신해주곤 했으니 참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한 친구는 그 정성이 너무 아까워 지금까지 사보한 악보들을 못 버리고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고, 또 한 친구는 그때 갈고 닦은 사보 솜씨로 작곡가인 남편의 악보사보에 일조를 했었다고 했다.  레코드가 귀해 제대로 음악을 들을 곳도 마땅치 않고 또 그나마 공부하는데 필요한 곡들은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어 그 당시 명동에 있던 「Dolce」나 종로에 있던 「Renaissance」라는 음악감상실에 사정해서 겨우 얻어듣던 그 열정이 그립다. 독어나 불어 Diction(발음)을 배우기 위해 무턱대고 외국어 학원이나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악보를 내밀던 그 용기가 또한 그립다.  연주회장이라고는 명동에 있던 옛 국립극장이 고작이었고, 저명한 외국음악가가 연주하겠다고 찾아올 리 없었던 시절, 그래도 우린 겁도 없이 그 험난한 음악의 고지에 도전하려는 패기가 있었다. 역시 젊었기 때문이였으리라… 다시 한번 그 젊음의 생동감을 느껴 보고 싶어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Johannes Brahms의 「Alte Liebe(옛사랑)」의 선율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애잔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여기에 옮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쉬운 대로 노래가사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려 보련다.  문 두드리는 소리났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고/쟈스민 향기를 들여 마셨지만, 내게는 꽃다발도 없구나.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 나를 응시하는 눈길/옛 꿈이 나를 사로잡아, 나를 꿈나라로 이끄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