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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호 2010년 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만남, 헤어짐, 기억하기






 고등학교 때까지는 위아래 학년들과 동기생들의 얼굴을 대충이라도 알고 지냈습니다. 지금도 이름까지는 아니어도 얼굴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를 들어오니 단과대학들로 갈라지고 학생 수도 많아 동문끼리 알고 지내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새 건물을 짓고 옮겨갔고 저는 졸업 후에 연건캠퍼스에 남게 됐습니다. 대학 졸업식을 하면서 처음 만났던 운동장을 빼고는 어쩌다 강의가 있어서 관악캠퍼스에 가더라도 솔직히 감성적으로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옛 친구처럼 서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요즘도 대학로의 옛 자리를 거쳐 점심 먹으러 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예전 모습을 반추하게 됩니다. 서울대학교 사람이 된 지 40년이 되어서인지 관악이든 연건이든 대학 캠퍼스라는 물리적 공간이 제게는 마치 사람처럼 헤어짐과 만남으로 다가옵니다.

 만남과 헤어짐은 학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동숭동에서 보낸 시절에는, 동양사학과나 심리학과 수업도 들으면서 의예과에만 매이지 않고 '서울대학교' 학생의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지금도 제 옆에 영문과나 철학과나 역사학과나 미학과가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책 읽다가 모르는 것 물어보러 뛰어가기에 관악은 너무 멀지요. 철이 나서 다학제간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미 제 옆구리는 허전합니다.

 올해부터 2년간 사단법인 대한의용생체공학회 회장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쉽게 말해 의공학회이고 의학과 공학, 공학과 의학이 만나 같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정신과 교수가 회장을 하는 것을 의아해하시는 분들께 저는 제 어머니는 의학, 아버지는 공학을 전공하셨으니 저는 태생이 의공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동안 수면다원 기록기의 국산화나 지능로봇 연구에도 관여하면서, 전임강사 시절부터 의료기기와 같이 지내왔으니 제가 아주 엉뚱한 곳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쩐 일인지 국내의 다학제간 연구는 아직 개방성, 솔직성,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자신에게 당장 직접적인 이득이 없어도 모두 개방해서 가르쳐 주는, 제가 경험한 미국 대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을 나누면 더 큰 지식이 된다는 지식 경영의 기본 원칙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적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일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누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집단과 나눌수록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집단간의 경쟁력 차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많이 됩니다.

 항상 서울대학교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더 자랑스러운 대학교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저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동문 여러분께서도 서울대학교를 아껴 주십시오. 얼굴로는 기억을 못해도 마음으로는 기억하는 사이가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관심이 있으신 동문께서는 대한의용생체공학회에 참여, 후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