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호 2010년 1월] 문화 꽁트
낯선 도시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법

그곳이 어떤 곳이든, 처음엔 도시의 모든 것들이 작정이라도 한 듯이 당신을 거부할 것이다. 사람도, 규칙이나 제도도, 심지어 한낱 길거리의 쓰레기통과 같은 사물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말미를 오롯이 그 부분에 할애하고 있듯이, 당신이 발을 디딘 도시에 스며들어 살아가기 위해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매순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한동안 당신을 거부하던 그곳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성격을 달리해, 이제는 당신이 그곳을 절대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게 된다는 사실이다.
- 토머스 E. 하위, '낯선 도시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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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지하철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좁은 틈이라도 이용해 신문을 보면서 지루함을 달래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보이는 차창 밖 어두운 터널 벽만 바라보며 삼십분 남짓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간에 발을 밟았다며 화를 내는 여자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는 남자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사람들은 마치 서로에게 기대어 서서 잠이라도 든 것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 심하지 않은 허기와 피곤을 느끼면서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왔어? 오늘도 어제만큼이나 피곤한 얼굴이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문을 열어줘야 했지만, 그 날은 그렇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지만 여전히 기척이 없기에 열쇠로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반 년 동안 내가 출근한 낮 시간에 자신의 짧은 직장 일을 끝낸 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거의 언제나 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던 그녀였다. 그렇다 보니 그 시간에 그녀의 부재는 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저 잠깐 뭐라도 사러 나갔으려니 생각하고 샤워를 했다.
냉장고를 열어 어떤 식재료가 남아 있는지 확인한 뒤 닭 가슴살 스테이크 두 개를 굽고, 그 위에 끼얹어 가며 먹을 카레도 두 사람 분량을 끓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내가 저녁을 만드는 내내 낮에 들렀던 곳들에 관해 무슨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옆에 서서 조잘대는 그녀의 목소리로 실내가 가득 찼을 것이었다.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기까지 몇 번인가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던 것을 보면, 그동안 내가 그녀의 조잘거림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식탁에 앉아 TV를 보며 기다려 봤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혼자서 저녁을 먹은 뒤 밤이 이슥해지도록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모습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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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녀를 찾아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실상 나는 J라는 이름 말고는 그녀에 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무지는 오롯이 그녀의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어둠을 유독 무서워해서 작은 등이라도 켜놓아야 잠이 들 수 있다는 것, 이런저런 요리의 조리법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정작 실제로 만드는 일에는 대단히 서툴다는 것, 훤칠한 키에 비해 작은 편인 가슴을 드러내기 싫어해 나와 사랑을 나눌 때에도 셔츠 따위의 윗옷은 꼭 걸친다는 것 등 따지고 보면 나는 그녀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를 찾는 일에는 손바닥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항들이었다.
오랜만에 맞닥뜨린 공휴일에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저녁 무렵 집 근처의 바를 찾아 혼자서 마티니를 홀짝거리던 날, 그녀는 내 앞에 나타났다. 바 안쪽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음악 소리에 노곤하게 젖어가던 나는, 어느새 옆에 와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 근처에서 무슨 재미로 술을 먹나 몰라, 약속도 없이."
"…."
"놀랄 것 없잖아. 당신 옷차림과 앉은 자세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걸 뭐."
"…."
"트레이닝복 바지에 헐렁한 셔츠 차림이니 집 근처인 게 분명하고,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도 도무지 돌아보질 않으니 약속도 없이 혼자인 거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흘리는 내게 그녀는 따라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J라고 소개했고, 그렇게 해서 그녀와 나는 나란히 바에 앉아 마티니를 마시게 됐다. 그녀는 전날 밤에 이 도시에 도착해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종일 돌아다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 바로 들어왔다고 했다. 앉은자리 옆에 다소곳이 세워둔 트렁크에 내 시선이 머무르자, 그녀는 자신을 여행객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이 도시에 '살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도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거리가 까만 어둠으로 칠해졌을 즈음 그녀와 나는 내 아파트로 옮겨 맥주를 마셨고, 그녀는 몹시도 피곤한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일할 곳과 머물 곳을 구하기 전까지 괜찮다면 내 아파트에 있어도 좋다고 말해줬다. 열흘쯤 지난 뒤 그녀가 오전에만 일하는 커피 전문점 일자리를 찾았지만 그녀는 내 아파트를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그녀와 나는 여섯 달 동안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함께 TV를 보고 함께 맥주를 마시고 함께 잠이 들었다.
*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오십일 가까운 평일과 이십일 가까운 주말이 지났다. 나는 지금 소파에 혼자 앉아, 무릎 위의 책 한 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물건들을 고스란히 트렁크에 넣어 간 듯 했는데, 유독 그 책 한 권만 가져가지 않았다. 원본이 아니라 복사를 통해 제본한 책의 겉장에는 토머스 E. 하위라는 이름과 함께 '낯선 도시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법'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How to infiltrate into a strange city and to live there'라는 영어 제목이 함께 쓰여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그 책을 발견하고 퇴근 후 시간을 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던 나는 오늘 저녁에도 캔 맥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이 발을 디딘 도시에 스며들어 살아가기 위해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매순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한동안 당신을 거부하던 그곳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성격을 달리해, 이제는 당신이 그곳을 절대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게 된다는 사실이다'라고 쓰인 부분에서 책을 덮은 채로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때부터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일러주는 일종의 지침서였다. 난생 처음 보는 이 책과 저자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싶어진 나는 광활한 인터넷 검색 망을 이 잡듯이 뒤져봤지만, 어쩐 일인지 도무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저 책 뒤 표지 안쪽에 쓰인 대로, '토머스 E. 하위는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일생동안 이름을 바꿔가며 전 세계 서른 곳이 넘는 도시에 살았다'는 간략한 작가 설명에 만족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책의 저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건가. 나와 살았던 잠시 동안의 기간을 뒤로하고, 지금쯤 또 다른 낯선 도시에 도착해 스며들어가고 있는 걸까. 하지만, 사실 내가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 이유는 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그녀가 사라지기 얼마 전부터 보였던 눈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말을 하는 중에, 또는 음식을 먹는 중에 어느새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표정의 변화는 전혀 없이 그저 눈물 두 줄기만 볼을 타고 스르르 흘러내리는 쪽이었다.
왜 눈물을 흘렸는지 나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말하지 않았지만, 혹 시나브로 내가 그녀로 하여금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그렇고, 책을 덮은 이유와는 또 다르게, 내가 다시 책을 집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도 불현듯 어느 낯선 도시로 훌쩍 떠나게 될까봐 두려운 걸까. 일생을 낯선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아간 하위라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녀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