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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호 2010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權 純 亨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 취임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나름대로 영광이라고 할까, 내가 하겠다고 해서 한 건 아니고 해보라고 해서 한 건데, 예술원 회장이란 게, 크게 뭐 대단한 것은 없어요. 회원 되고 싶어하는 분들은 많은데 인원은 정해져 있고 또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보니…, 다 되면 좋은데 말이죠. 그런 가운데 회장이 됐으니 참 영광스러운 일이죠."

 - 회장님은 언제 회원이 되셨어요.

 "17년 정도 된 것 같아요. 63세에 됐으니까 오랫동안 한 거죠."

 - 예술원 회장은 예술원 전체 회원들이 투표를 해서 선출되나요.

 "그렇죠. 위에서 지명하는 게 아니고, 회원간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되죠."

 - 선생님이 벌써 34대 회장이세요. 예술원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예술원은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아니고, 문학, 미술, 음악, 연극ㆍ영화ㆍ무용 분야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을 예우하는 곳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뒤따라오는 분들에게 자극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원로 예술인들 그 자체가 귀중한 문화적 자산 아닙니까. 사실 사람보다 더 소중한 자산은 없잖아요.

 예술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으로 직원이 사무국장을 포함해 14명입니다. 예술가 관리와 진흥 업무를 맡고 있죠. 회원 정수는 1백명인데 현재 87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 회원들 중에 최고 연장자는 올해 1백세 되시는 金聖泰선생이에요. 회원 중 80대 후반이 절반이 되고 그 이하가 반정도 되고요.

 정기 행사로는 미술 분과에서 매년 전시하는 게 가장 커요. 다른 분과에서는 모여서 하기가 어려워서 잘 못하고 있어요. 미술은 나이 들어서도 나름대로의 세계를 평가받을 수 있는 분야예요. 일생동안의 전성기라는 것은 항상 중년에 이뤄지지만, 말년에도 전공을 살려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도자기를 만들고 서예를 꾸준히 하죠. 그렇게 하면서 일년에 한 번씩 전시를 즐겁게 하고 있어요. 정기적으로 이걸 해라, 그런 것은 아니고요."

 - 회원들 대우는 어떤가요. 연금이 나가나요.

 "연금은 아니고, 회원이 되면 소위 활동지원금이라고 해서 한 달에 1백30만원이 지급돼요."

 - 회원은 종신인가요.

 "네. 하지만 중간에 체크는 해요. 엉뚱한 짓을 한다든지 사회에 무리를 주는 행동을 하면 제명될 수 있죠. 그 외에는 존속 유지됩니다."

 - 그러면 활동지원비 외에는.

 "사실은 정부에서 좀 더 해줬으면 좋겠지만, 정부도 기준에 의해서 하는 거니까 혜택을 받는 입장에서 더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고. 감사하고 있죠."

 - 회장님이 선출된 이유, 배경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회원이 된 지 오래되서 예술원의 관계를 잘 알고 그러니까 한 번 좀 앞에 서서 해봐라, 그런 것으로 생각해야지, 회장이 된다고 해서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또 어디 가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 매년 결원이 생기면 정원 1백명 안에서 보충을 하나요.

 "그렇죠."







 - 예술원이면 원장이란 호칭이 어울리지 않나요.

 "원장이라고 하면, 소위 기관의 장이 되잖아요? 우리는 공무원이 아니니까, '예술원 회원들의 회장이다' 해서 회장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 예술이란 게 정치하고 별개인데 그동안 정치 바람을 탄 적은 없었죠.

 "정부가 순수한 의미에서 지원하는 곳이고, 정치 바람이 표현되면 벌써 예술가로서의 자격이 상실되는 것이죠. 그러면 벌써 대상에서 제외되죠."

 - 살아오신 이야기를 여쭤 볼게요. 어떻게 도예를 하시게 된 거예요.

 "묘하게 된 건데, 1959년에 미국에서 1년간 유학 기회를 얻었어요. 미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공예시범소라는 곳에 있었는데, 그곳이 미국무성 산하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Administration) 원조를 받는 곳이었어요. 거기서 1년간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해줬어요. 여담이지만, 비행기도 노스웨스트 쌍발 비행기 1등석을 탔어요. 미국에서 원조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예우를 해 준거죠. 비행기 기내식에서 양식이 나왔는데 내 경우는 다행인 게 학교 다닐 때 張 勃학장이 응용미술과, 디자인 쪽의 학생들을 조선호텔에 데려가서 양식 먹는 방법을 실습차원에서 가르쳐 줬어요. 스푼, 포크, 나이프 놓는 순서, 뭐를 어떻게 들어서 어떻게 먹고, 그 다음에 끊는 것은 어떻게 끊는다는 것을 학장님이 직접 보여주시면서 가르쳐 주셨죠.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요. 덕분에 1등석에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먹을 수 있었어요.(웃음)"

 - 문득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생각이 납니다.

 "그렇죠. 어떻든 워싱턴에 도착해 한 달간은 미국 생활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9월에 클리블랜드 예술연구소에 가서 디자인을 공부했는데 프로덕트 디자인, 커머셜 디자인, 에드버타이징 디자인, 그 다음에 세라믹을 배웠어요. 지금도 감사한 것이 쉐어라는 이름을 가진 내 후원자가 '여기서 배울 것을 모두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서 후대를 키우라'고 격려를 해주시면서 내 대신에 수강신청을 다 해줬어요. 당시에 나도 열정이 강해서 전공을 두 개나 선택했어요. 그런 사람은 나 밖에 없었죠. 낮에는 기본 디자인을 배우고 저녁에는 도자를 배우고. 당시 서른 살이었는데 스무 살 학생들과 묻혀서 뒹굴었죠. 1년간 공부해서 성적을 좋게 받았어요. 남이 한 점하면 나는 두 점, 세 점을 냈어요. 그랬더니 지도교수가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다른 학생들에게 '여기 코리아에서 온 미스터 권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희는 뭐하냐'며 야단도 치고 말이죠.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모교 미술대학으로 와서 시간 강사를 했어요."

 - 그러니까 도예는 미국에서 처음 하신 거네요.

 "그렇죠. 돌아와서 가르치는데, 가마가 없잖아요. 그래서 경기도 이천에 졸업반 아이들을 데려가서 '흙 좀 만져보라'며 시골 초가집에서 작업을 시작했죠."

 - 원래 도자 전공도 아니셨는데, 도자의 어떤 부분에 그렇게 끌리셨나요.

 "당시 내가 공부했던 60년대 미국에서는 도자 분야가 굉장히 평가를 받고 있었어요. 서양에는 원래 없는 것인데, 동양의 어떤 흐름이 건너오면서 대학원에서 코스를 막 만드는 시점이었고, 그때가 한창 도자가 뜨는 시기였어요. 나는 내심 청자, 백자가 있는 한국이야말로 도자의 원조 아닌가,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살릴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하게 된 거죠. 서양과 동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말이죠. 처음에 작품을 보더니 사람들이 '이게 어떻게 도자기냐' 하면서 의아해 하더라고요. 남이 뭐라 하건 눈치 안보고 밀고 나갔죠. 그랬더니 나중엔 '색을 어떻게 이렇게 낼 수 있냐'며 백자 청자만 보다 색이 들어가니깐 전부 호감을 갖고 받아 주더라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들도 길러냈죠. 그때 제자들이 지금은 다 환갑을 넘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졸업생들의 말년도 상당히 보람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도자라는 게 우연적인 요소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불과 유약과 ….

 "유약을 불로 조절하는데서 자기 나름대로의 색을 조제해 농도가 침침한 것을 원하면 그것으로 가고 밝은 쪽으로 가려면 밝은 쪽으로 가고, 어떤 절대적인 것은 없어요."

 - 선생님이 평소 생각하시는 철학이라고 할까, 도자를 통해 무엇을 깨달았다거나 배웠다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도예작업은 상당한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해야 합니다. 불을 잘못 때면 몽땅 없어지고, 반복해서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기가 생각지도 않은 묘한 감정이 곁들여진 작품이 나오거든요. 끊임없는 반복, 반복입니다. 제가 국내에서만 18번 개인전을 했어요. 초대전 혹은 순회전을 통해 미국, 캐나다에서 전시한 적도 있고요. 지금 굉장히 아쉬운 것은 다시 반복해서 나올 수 없는 작품들이 어디 가서 숨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예전에 강북에 살 때 두 번 이사하고 강남으로 와 세 번 이사하고 지금 시골로 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찾기가 어려워요.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데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웠어요.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이렇게 생각해요."

 - 예술가의 길이 보통 힘들다고 하는데요.

 "그런 것은 느껴보지 못했어요.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냐,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냐, 생각을 많이 하긴 했죠. 그때는 부모님이 반대했어요. 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이상하게 미술에 끌리는 게 있었어요. 또 항상 미술 선생님에게 귀여움을 받았어요. '저 권순형처럼 해라' 그런 소리도 듣고. 내가 이쪽으로 감각이 있나 보다 해서 밀고 나오다 보니까 지금에 오게 된거죠. 그동안 애로점은 있었지만, 안 될 때는 섭리로 이해하고 그런 거라 여기고, 또 하다보면 뭐가 생기고 아껴주고 하니까…."

 - 미술은 아무래도 재능이 있어야 하죠.

 "재능이 있어야죠. 재능 없이 된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한 거고. 하지만 재능과 더불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노력이 수반돼야 결실을 맺을 수 있죠."

 - 회장님 작품은 도자에 아름다운 색깔을 자유자재로 넣으셔서 마치 풍경화나 추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으셨어요.

 "山水도 있고 우주의 변화, 산 속 또는 잎 속에서 발생하는 현상, 물 속에서 요동치는 것이라든지 자연을 대상으로 한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도자의 색깔이라는 것은 불로 굽기 전에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대충 이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도자가 불에 들어가 열을 받아 재발색을 하면, 그것은 다년간의 체험을 통해 습도는 이 정도로 맞추고 열은 이렇게 하면 이런 색이 나오겠구나 하는 건데, 생각보다 잘 나오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어요."

 權회장의 작품은 항아리, 병 등에서 탈피해 도예를 장식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고층건물의 로비나 회의실, 야외공간이나 공원 등에 도자 벽화를 처음 시도한 것도 權회장이다. 도예의 영역을 산업적으로 확장한 선구자인 셈이다. 일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미술공예=도안' 혹은 '도자공예=청자재현'이라는 인식이 지속되던 시기에 그와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현대공예가 뿌리내리도록 큰 역할을 했다.

 -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젊은이들의 감각이 섬세한 것도 있고 러프한 것도 있는데, 그것은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해 갈 수 있는 것이죠. 문제는 소위 인간성, 도덕적인 부분과 관련해 날라리 같이 가는 파트들이 있는데 그것이 좀 위험스러운 감이 들어요. 개인은 기분 좋아서 할지 모르지만, 남이 볼 때는 염려되는 면이 있어요. 너무 가볍고 그런 쪽으로만 가서…. 모든 것이 기계화되는 요즘 역으로 생활에서는 차분하면서 정서적인 면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 서울대 선배님이자 명예교수로서 동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제 분야에만 힘을 쓰다 보니까 동창회에 참여를 많이 못하고 의무만 하는 정도죠. 동창회에서 각종 행사를 벌이고 학생들을 지원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보면, 이런 것은 어느 나라에 내놔도 우리 서울대처럼 하는 곳은 없는 것 같아요. 기적적으로, 노력의 대가가 그렇게 현저하게 나타날 줄 몰랐죠. 그런 면에서 동창회에서 일하시는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은 역시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즐겁게 동창회보도 보고 있습니다."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ㆍ정리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