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호 2009년 12월] 문화 꽁트
모차르트는 늙지 않는다
과사무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일요일 오후 고적한 캠퍼스의 어둡고 긴 복도에는 아들과 나의 구두소리만 퍼져나갔다. 삼십여 년 저 쪽의 여유로운 캠퍼스에 비해 콩나물을 심어놓듯 틈만 보이면 건물을 빽빽이 세워놓아 답답해 보였는데, 그 사이 정들었던 그곳은 다른 건물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소식이 끊긴 아들을 찾아 이곳 과사무실 주변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이제는 그때의 내 나이에 육박한 아들을 데리고 그 시절 그곳을 산책하는 마당이니 세월이 참 오묘하다.
수능시험을 끝낸 아들 녀석이 아버지가 다니던 대학을 구경하고 싶다고 청해서 일요일에 산책 겸 들른 길이었다. 아들과 함께 이 캠퍼스를 거닐게 되리라곤 그 시절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당장 하루 앞이 불투명한 나날이었으니 어찌 삼십여 년 뒤에, 그것도 아들과 함께 캠퍼스를 걷는 꿈이 가당키나 했었을까.
건물에서 빠져 나와 교정을 걸었다. 겨울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가을이 너무 짧은 것 같아 섭섭하고, 그렇다고 늦가을이라기엔 벌써 대관령에는 첫눈이 내렸다니 그것도 멋쩍은 명명이다. 이래저래 한 해 중 가장 존재감이 희미하고 쓸쓸한 십일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캠퍼스 곳곳에는 나무들이 마지막으로 떨구어낸 이파리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캠퍼스에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서 형태가 바뀌긴 했어도 도서관과 본부 건물 사이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시절 사복 경찰들이 캠퍼스 곳곳의 벤치를 장악해 삼엄한 경계를 펼쳤어도 늘 시위에 불을 붙이는 곳은 도서관 난간이었다. 핸드마이크 사이렌을 울리며 난간에 나타난 학생이 구호와 함께 유인물을 눈처럼 뿌리면 학생회관이나 아크로폴리스 이곳 저곳에 산재했던 학생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대오를 형성했다. 이어 함성이 캠퍼스를 뒤흔들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탄이 터지고 전경들의 군화발 소리가 함성과 부딪쳤다. 쫓고 쫓기는 마라톤이 광활한 캠퍼스 곳곳에서 펼쳐졌다.
그네를 만난 것도 그 와중이었다. 최루가스 때문에 눈물범벅이 돼 쫓겨다니다 소용돌이가 잠잠해질 무렵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주저앉아 있는 그네를 보았다. 머리를 다리 사이에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품이 계속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석양녘이었고, 찬바람이 산 중턱에 자리잡은 캠퍼스를 휘감았다. 그냥 지나치기가 안쓰러워 그네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나직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네와 함께 학생회관 식당에 들러 허기진 배를 채우고 버스 정류장까지 나란히 걸어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네의 과 선배가 그날 도서관 난간에 올라갔었던 모양이다. 그 선배는 그날 시위에 불을 붙인 후 그를 잡으러 난간 양쪽에서 접근해 오는 이들을 피해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몸을 던졌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참 가슴 아픈 이야기는 많고도 많다. 그때의 아픔과 고통을 아들에게 말해준들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지나 학생회관으로 향하는 도중 멍하니 도서관 난간을 올려다보고 서 있는 나에게 녀석이 길을 재촉하며 물었다. 도서관만큼은 아니지만 녀석도 한참 올려다봐야 한다. 씨도둑질은 못한다는데 나는 그저 중키에 불과한데도 녀석은 1백90센티미터를 넘어서 버렸다. 상념에서 깨어나 녀석을 올려다보며 슬쩍 웃어줬다.
"응, 아버지 학교 다닐 때 사귀었던 여학생이 생각나서…. 너는 수능도 끝났는데 만나는 여친 없냐?"
아들이 흥미롭다는 듯이 반색을 하고 재우쳐 물었다.
"그래서요, 그 여학생과 얼마나 사귀셨는데요? 엄마에겐 비밀로 할게요."
어느새 성인이 된 아들과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말을 섞게 된 상황이 흥미로웠고, 한편으론 뿌듯하기도 해서 아들의 질문에 더 적극적으로 답했을 것이다. 사나이들끼리 서로 비밀 하나쯤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심정으로 슬며시 녀석을 떠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게다.
"그럴 수 있겠냐? 엄마가 알아도 큰 상관은 없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야. 네가 끝까지 비밀을 지킨다면 묻는 대로 솔직하게 말해줄게. 그 여학생과는 2학년 때 만나서 졸업할 때까지 붙어 다녔다. 참 예뻤고 취향도 나와 비슷해서 서로 무척 좋아했지."
"엄마도 같은 캠퍼스에 다녔는데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있나요?"
"야, 이 녀석아! 아무리 같은 캠퍼스에 있어도 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누가 누구와 붙어 다니는지 그걸 어떻게 다 아냐?"
녀석은 아버지의 옛 연인이 대단히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녀석이 바짝 관심을 보이자 나는 나대로 새로운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내친 김에 더 나아가 버렸다.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온 후 취직한다고 우왕좌왕하던 와중에 그네와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하지만 세월이 조금 흐른 뒤 다시 오래 만날 수 있었어…."
처음에는 그저 아버지의 흘러간 가벼운 추억으로만 알고 흥미를 보이던 아들 녀석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녀석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따라왔다. 학생회관의 외양은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일층 식당의 의자들이 고급스럽게 바뀌었고 군데군데 칸막이가 생긴 정도에다, 백반 한 끼에 4백원이었는데, 그 돈도 궁해서 식판 하나로 여러 번 음식을 타와 친구들끼리 나눠 먹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 가격이 지금은 2천원으로 오른 것 정도만 빼면 예전 그대로였다. 이층으로 올라가 그네와 함께 부대꼈던 서클룸을 찾았지만 그 자리는 좀체 찾기 어려웠다. 공사를 다시 해서 방을 늘리고 크기도 변형시켜놓아 막연히 예전 위치만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시절 우리는 과사무실보다는 이곳에 머무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네와 나는 단과대학이 다르고 당연히 과사무실도 떨어져 있었기에 우리의 아지트는 서클룸일 수밖에 없었다. 그네와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그 시절 모든 학교생활은 서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사실, 지금 젊은이들이 누리는 자유롭고 분방한 연애에 비하면 그 시절의 만남은 연애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어둡고 무거운 시대 분위기 때문에 서클 안에서 서로 조직원들끼리 연애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선배들은 조심하라고 당부하곤 했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뒤 그 선배들이 후배들과 연애를 했던 사례들이 속속 드러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네와 나는 이미 소문난 관계였던 터라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튀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용인되는 커플이었다. 그렇게 조신하게 처신해야 하는 분위기 자체가 오히려 우리를 더 뜨겁게 만드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 분… 지금도… 만나세요?"
내내 침묵을 지키며 뒤만 따르던 아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아버지의 옛 연애의 추억을 들추던 녀석이 복잡한 표정으로 주저하는 모양이 우스웠다. 뭐라고 답변을 해줘야 할까. 정직하게 말해버릴까, 아니면 적당히 포장을 해놓았다가 후일 녀석이 세상에 나와 본격적으로 연애도 하고 이러저러한 인간관계를 헤치고 나온 뒤 다시 이야기를 나눠볼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겠냐? 비밀 지킬 자신 있어?"
"제가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 집의 평화가 깨지는 건가요?"
"글쎄…."
"아버지 죄송해요. 그렇다면 듣지 않을래요. 그냥 묻지 않았던 걸로 해주세요."
'자식, 소심하기는!'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내심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랴, 한 번 발설했는데 끝까지 가는 수밖에.
"이왕 꺼낸 말이니 애매하게 눙치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나… 지금까지, 그 여자,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다…."
학생회관에서 나와 정문으로 가는 대로변에 들어섰다. 가지에 얼마 붙어 있지 않은 은행잎들이 석양녘의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도 떨었다. 아내였다. 애초에 아내도 오랜만에 모교 캠퍼스를 아들과 함께 거닐고 싶어했는데, 성당에서 봉사할 일이 생겨 부자만 온 거였다. 뒤늦게 서둘러 일을 마친 아내가 지금 정문을 차를 몰고 통과하고 있다는 전화였다.
잠시 기다렸다가 아내를 데리고 음대 쪽 식당으로 올라가 커피를 마셨다. 모처럼 남편에다 아들까지 동반해 추억의 교정을 찾아 상기된 아내의 귀밑에 흰 머리칼이 설핏 보인다. 그 시절 음대 쪽에서는 늘 오랫동안 남아 연습하는 학생들의 각종 악기 소리가 분위기를 돋우어주곤 했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학교에 나온 학생의 호른 연습소리가 줄기차게 들려왔다. 세월이 흘러 사람은 늙어가도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들은 제 어미가 온 뒤부터는 어둑해지는 창 밖을 멍하게 바라볼 뿐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녀석, 저리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 앞으로 어찌 연애는 하려나.
"여보, 얘가 왜 이리 심각해요? 꼭 당신 학교 다닐 때 표정 같네요. 서클룸에 들를 때 저녁 무렵이면 당신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그때는 그게 멋있어 보였어요."
아들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고개를 돌려 아비와 어미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제야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은행잎 하나가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치더니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