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호 2009년 11월] 문화 꽁트
모기

가을비가 내리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꽃을 사 들고,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작업실로 갔다. 현관 안으로 채 다섯 걸음도 들어가지 못해서 누군가의 칼에 등을 찔렸다. 영혼에 닿을 듯 깊숙이 박히는 칼날을 옆구리로 한 번 더 받아낸 다음에야 저항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갔다.
범인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은 생각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숨이 남아 있었다. 호흡이 점점 가늘어지자 세 번째 칼날이 두려워졌다. 몇 번 남지도 않은 마지막 숨이 그렇게 달게 느껴질 수 없었다.
범인은 쓰러진 내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나를 그냥 내버려둔 채 현관 쪽으로 사라졌다. 망설임이 아니라 동정의 표시였다. 나는 곧 아내를 떠올렸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 날이 멀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는 그 모든 일을 예감하고 말았다.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 어디 아파?"
"왜? 싫어?"
아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은지는 금세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우리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출장 간다고 하고 그냥 가면 안 돼요?"
"안 돼. 딴 사람은 속여도 그 사람은 못 속여."
"왜요?"
"그 여자니까. 들키면 죽어. 진짜로."
현관 쪽으로 사라지던 발소리를 떠올렸다. 여자 발소리가 틀림없었다. 보지 않아도 보폭을 떠올릴 수 있는 우아한 걸음걸이. 무대 위를 걷던 아내의 작은 발. 아내는 피를 두려워했다. 직접 해결하러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끝내 숨통을 끊지 못한 것을 보면 아내는 여전히 피가 두려운 모양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통이 영혼 근처로 파고들었다. 심장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산산이 부서지는 칼날 같은 소리였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졌다. 삶이 서서히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침묵 저편으로부터 모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앵 하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공습 사이렌보다 더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대는 급강하 폭격기의 신경질적인 프로펠러 소리가 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 순간, 거의 꺼져 가던 생의 불씨가 다시 한 번 타올랐다. 죽음이 잠시 뒤로 미뤄지고, 하다 만 생각이 다시 이어졌다. 이 집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그보다 왜 하필 여기였던 걸까? 생각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아내는 은지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진실을 알려야 했다. 손에 피가 묻어 있는지 궁금했다. 바닥에 대고 손바닥을 문질렀다. 미끄러웠다. 바닥이 온통 피였다. 엎드린 채로 팔을 옆으로 뻗었다. 마른 바닥이 나타났다. 거기에 피 묻은 손으로 W라고 썼다. 손가락을 아래위로 두 번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글자였다. 아내의 이니셜이기도 하고, 와이프(wife)라는 뜻도 됐다.
메시지를 남기고 나자 마음이 놓였다. 이제 은지가 누명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은지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도 예술가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은지처럼 보살핌이 필요한 경우는 아니었다. 아내와는 달리 은지의 예술혼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절박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다시는 켜지지 않을 것처럼 애처롭고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 지켜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내가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실수를 하다니.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곧 숨 쉴 힘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확실히 해 두지 않았을까? 감정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아내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라면 아내는 절대 망설이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피를 보는 일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보다 더한 것이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아내가 아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였을까? 다른 용의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만한 원한을 산 기억은 없었다. 아내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다시 모기 소리가 들렸다. 숨 쉴 힘밖에 안 남은 줄 알았는데 오른쪽 어깨가 저절로 움찔했다. 급강하 폭격기의 이름이 생각났다. 슈투카였다. 밤하늘을 가르는 높은 톤의 프로펠러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는.
미칠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신경세포가 모기 소리 하나에 전부 집중돼 있었다. 손을 흔들어 귓가의 모기를 쫓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숨도 거의 쉴 수가 없었다. 신경만 날카롭게 곤두섰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기한테 온 신경을 집중하다니,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의외로 은지보다 아내가 먼저 떠올랐다. 아내는 강한 사람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아내는 자신이 나에게 한 일을 춤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사뿐사뿐 걸어가던 아내의 발소리.
아내는 끝내 나를 사랑했던 모양이다. 마지막 연민을 보여줬으니까. 나는 그런 아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됐다. 왜 아내는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짓지 않았을까. 연민 때문이라면 끝까지 지켜봐 주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혼자 죽는 것보다는 그게 좋은데.
혹시 은지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난다고 했으니 적어도 10시 이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쓸쓸한 죽음이었다. 작업실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창문이 전부 닫혀 있어서 바깥 풍경을 볼 수도 없었다. 은지의 취향은 아니었다. 단지 며칠이나 작업실을 비워뒀기 때문이었다. 은지가 있었다면 아마 불이란 불은 다 켜고 창문까지 전부 열어 젖혔을 것이다.
아내가 없는 동안 가끔 은지가 우리 집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은지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면서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볼까봐 그래요? 그렇게 꽁꽁 닫아 놓으면 더 수상해 보여요. 차라리 이렇게 활짝 열어 놓으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꺼림칙했다. 누가 볼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었다. 다른 여자를 아내의 집에 들여놓다니.
"다른 사람 눈 때문이 아니라 모기 들어올까 봐 그러지. 한여름에도 모기 한 마리 없던 집인데 너만 왔다 가면 꼭 모기가 생겨."
"그래도 환기는 해야죠. 와이프 있을 때 와이프도 환기 안 했어요?"
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의 존재를 언급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한 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꺼림칙한 느낌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왔다 간 게 틀림없었다. 며칠이나 닫아뒀다는 작업실에 저렇게 쌩쌩한 모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당연히 은지일 것이다. 아내라면 남의 작업실 환기 같은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테니까.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냄새만 맡아 봐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은지였다. 두 번이나 등 뒤에서 나를 찌른 여자. 아내가 아니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 준 은지의 알리바이가 떠올랐다. 아내 몰래,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몰래, 둘이서 여행을 떠나려고 만든 계획이었다. 알리바이가 없는 쪽은 오히려 아내였다. 공연 준비 기간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나 때문에 귀국했다는 것부터가 수상한 일이었다.
피로 쓴 W를 지워야 했다. 어떻게든 아내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었다. 나를 보러 달려오지만 않았더라면. 숨이 끊어져 가는 마지막 몇 분만이라도, 그 한 순간만이라도 내가 더 현명했더라면 아내는 그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뼈가 저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숨이 멎었다. 고통이 엄습해 들어와 내 영혼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나는 비로소 내 영혼이 깃들어 있던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됐다. 나는 죽음에 외접했다. 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기였다. 더는 몸이 움찔거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동기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은지와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마 은지도 그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애애앵 모기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쫓아낼 방법이 전혀 없었다. 잠시만 조용히 해 줄래? 곧 끝나니까. 그러자 갑자기 소리가 멎었다. 고마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마 목덜미에 앉은 모양이었다. 제발 잠깐만. 딱 10초만. 10초 뒤에는 뭘 하든 상관 안 할 거니까.
어쩌면 아내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알게 되겠지.
이미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갔다. 얼마나 피를 흘려야 사람이 죽을까. 모기가 바늘을 찔러 넣었다. 내 영혼을 지탱할 마지막 한 방울이 흡혈귀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내를 배신한 데서 오는 수치심이 내 영혼을 산산이 갈라놓았다.
모기가 또다시 바늘을 빼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