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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호 2009년 9월] 문화 꽁트

격세지정(隔世之情)



 "격세다, 격세야!"

 오전까지 스물다섯 시간의 동물보호소 봉사를 마친 왕기태씨는 차에 올라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깟 강아지 뱃구레를 발로 한 번 차줬다고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 알면서도 억제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말세다, 말세!"

 어느 순간에 세월이 이렇게 됐나. 개나 고양이가 사람보다 더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생태주의자들은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강변했다. 5백호 이상 되는 아파트단지에는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동물공원'을 5백평 이상 되는 넓이로 설치해야만 했다. 애완동물을 데리고 산책을 나오면 삼십분 이내에 동물공원에 풀어놓아야지 개줄을 매어 계속 끌고 다닌다든가 변을 보자마자 변봉투를 들이대어 동물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애완동물의 안정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왕기태씨도 십여년 전에는 눈이 예쁜 쉬츠를 한 마리 길러본 적이 있다. 개가 순하기도 했고 줄을 묶어 끌고 다니기도 귀찮아 산책을 나오면 공원에서 뛰어놀도록 풀어놓았다. 아예 줄을 매지 않고 데리고 나와도 뒤를 졸졸 잘 따라다녔다. 그러면 항의가 들어왔다. 개가 무서워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지 못한다는 둥, 개똥을 치우지 않아 더럽고 냄새가 난다는 둥 관리실을 통해 연락이 왔다. 면전에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고, 아파트단지 주민들이 운영하는 까페에 사진과 함께 비난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바람이 불고 '동물과 인간의 공존운동' 운운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에 동물들의 세상이 돼 있었다. 길을 걷다 보면 개와 고양이, 토끼, 심지어는 너구리나 오소리, 사슴까지 발길에 툭툭 차이고 몸에 부딪혔다. 서울대공원 같은 큰 공원에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구역과 건물이 따로 설치됐다. 그야말로 동물들은 자유롭고 인간들은 섬에 갇힌 것이다.

 "아니, 이런 일로 쓸데없이 사람을 오라가라 하나?"

 증거 동영상과 함께 동물학대 신고가 들어왔다고 경찰서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고 출두한 왕기태씨는 우선 호통을 쳐보았다.

 "먹고살기 바쁜 사람이니 빨리 보내주시오."

 "안되겠는데요. 이전에도 고발이 여러 건 접수돼 있네요." 하면서 경찰관은 몇 장의 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웠다. 짖어대는 개를 발길질로 위협하는 장면, 길을 막고 있는 고양이떼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장면, 벤치에 앉아 있는 비둘기떼를 막대기로 쫓아내는 장면 등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물론 왕기태씨 자신이었다.

 "벌금 이백만원, 사회봉사 25시간입니다."

 경찰관은 다시 또 걸리면 실형을 살 수도 있다고 친절한 안내인지 협박인지를 통고하고 처분장을 줬다. 사회봉사 장소는 동물보호소였다. 거기서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동물들을 상대로 스물다섯 시간 동안 '즐겁게' 놀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기태씨는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젯밤 작성한 성명서 문안을 다시 점검하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창립 선언과 성명서 발표는 오후 다섯시 예정이지만 시간 여유는 별로 없었다.

 "박회장님, 몇 분이나 오실 수 있나요? 네에…. 되도록 많이 와주시고요, 네시 반까지는 나와주세요."

 '4대강 되살리기 반대운동본부' 박광두 회장은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했다. 제2의 남북분단 사태를 막는 데 힘을 합치겠다고 했다.

 시간 여유가 좀 있었지만 왕기태씨는 마음이 조급했다. 자전거 전용도로 구간에서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자동차는 8차선 도로에서도 왕복 2차선만 통행이 허용됐다. 시내 대부분이 자전거 전용도로가 설치된 구간이고, 지역과 지역간 장거리를 연결하는 도로만 자동차가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있게 차로와 시설이 구비돼 있었다.

 왕기태씨는 옆으로 흘러가는 거대한 자전거의 물결을 보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도로 사정이 고속도로로 나가기 전까지는 자전거보다 빨리 달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십년쯤 전이었나. 정부에서 자전거 타기 운동을 벌이는가 싶더니 불과 십여년 만에 전국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설치되고 거리는 자전거 세상이 됐다. 하이브리드 자전거가 나와서 언덕을 내려가거나 평지를 달릴 때는 전기를 만들어 비축했다가 언덕을 올라갈 때는 그 전기를 사용했다. 자전거만이 아닌 자동차와의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자는 일부 야당과 자동차 업계 쪽의 반대가 있었지만 '일부 몰지각한 소수의 반대'로 간주됐을 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내를 빠져나와 자유로로 접어드니 그래도 소통이 나았다. 북으로 북으로 달려 왕기태씨는 도라산역 광장에 도착했다.

 역 휴게실에는 동지들이 일부 도착해 플래카드를 점검하고 오늘 띄워올릴 풍선에 공기를 넣어 부풀리고 있었다. 이벤트가 있어야 주목을 받고 언론에 눈에 띄게 보도가 된다. 하지만 삭발식이나 단식 투쟁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박회장님, 한 백 명은 나와줄 것 같죠? 성공적입니다. 그쪽 일은 잘돼 가시죠?"

 "웬걸요, '4대강 되살리기 반대'라니까 무슨 죽이자는 운동으로 아는데 '되살리기 반대'면 '살리기' 아닙니까."

 "그렇죠. 옳은 말씀이십니다."

 "십여년간 수십조 돈을 들여 살려놓은 강을 또 수십조 들여 되돌리고 있으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야당이나 여당이나 한통속으로 그러고 있으니…."

 "우리가 언제부터 콘크리트, 아스팔트를 싫어했나요? 콘크리트 걷어내고 흙으로 돌아가자! 말은 좋습니다만 포장도로, 댐, 접안 도크, 위락 시설 그런 걸 왜 철거합니까? 다 필요한 것이지요. 안 그래요, 왕회장님?"

 "백번 천번 지당하신 말씀! 힘을 합쳐 4대강도 살리고 제2의 분단도 막아냅시다. 파이팅!"

 왕기태씨는 박광두 회장과 하이파이브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이번 법안이 통과되면 남북을 왕래하는 경의선 철길을 비롯해 육로가 막힌다. 생태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최면들이 걸린 것인가. 아니면 대다수 국민이 극한적 생태주의자가 되고 만 것인가. 어이가 없다. 대체 도로와 교통 수단은 단계적으로 마련한다는데, 당장 남북을 왕래하는 교통 사정은 지옥이 될 게 뻔했다. 그러면 개성공단에 공장을 갖고 있는 왕기태씨의 자동차부품 회사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남쪽에서 출퇴근하는 직원들은 교통 지옥에 시달리고 퇴사자도 속출할 것이었다.

 "왕회장님, 준비됐습니다. 광장으로 나가시죠."

 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손에 손에 피켓을 든 동지들이 환호했다. 왕기태씨는 '축 결성 - 제2의 남북분단을 막는 국민행동' 플래카드를 바라보았다. 광장 반대쪽으로는 수십명의 전투경찰대원들이 도열한 채 로봇 같은 무표정으로 이쪽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기태씨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었다.

 결성식이 순서대로 진행되고 성명서 낭독 차례가 됐다. 왕기태씨는 천천히 또박또박 성명서를 읽어내려갔다.

 "비무장지대의 생태계를 보존하자는 명분으로 남북을 왕래하는 철길과 자동찻길을 모두 폐쇄한다는 엄청난 폭거에 우리는 결연히 항의합니다. 철길과 자동찻길로 나뉜 비무장지대를 통일해 생태벨트를 완성하는 것은 중요하고, 남과 북이 생태벨트에 의해 둘로 나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입니까? 오년 전 개통된 남북간 지하철과 지하도로로는 폐쇄되는 도로의 교통수요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발표된 지하도로 확장 계획을 보면 빨라야 십년 후에나 완공될 예정입니다. DMZ 생태공원은 1945년 분단과 한국전쟁이 가져온 산물입니다. 그 이전의 상태로 돌리지는 못할망정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모든 육로를 폐쇄해 제2의 분단을 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생태계 보존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온당치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견결히 막아낼 것입니다. 북한에 계신 벗들도 우리의 이런 노력에 전폭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왕기태씨는 풍선에 성명서를 매달아 하늘로 띄웠다. 수십 개의 풍선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여행객과 구경 나온 일부 시민들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실례합니다. 집단으로 풍선을 날리는 행위는 '鳥獸의 평온과 안면의 보장 및 유지에 관한 법률' 제17조 2항 위반임을 알려드립니다. 함께 가시죠."

 어느새 다가와 있던 경찰관이 왕기태씨의 팔을 다정하게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