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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호 2009년 8월] 문화 꽁트

그 여자의 웃음소리




 대학교 입학식 날 아침, 어머니는 나에게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내가 혹시라도 나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내 개인과 집안 전체의 앞날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게 될까봐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어머니의 여성판별법을 기도문처럼 외우고 난 뒤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 여성판별법의 앞부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좋은 여자는 항상 걸음걸이도 다소곳하고 말소리도 조용하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는 언행이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며 냉정하다. 좋은 여자는 절대로 웃음소리를 담 너머로 내보내지 않는다.' 이 부분을 외울 때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건 바로 어머니 자신이네요.' 나는 어머니가 크게 웃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 과에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약간 까무잡잡한 얼굴에 알 듯 모를 듯 옅은 웃음이 살짝 얹혀 있는, 그런 대로 괜찮은 생김새의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남학생들한테 예쁘게 보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지, 옷에도 머리에도 걸음걸이에도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리 바지를 입고 다니기까지 했다.

 이 학년 봄, 신입생 환영 야유회 때였다. 모두들 풀밭에 둘러앉아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삼십여 명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질러대는 괴성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내 귓속까지 흘러 들어오는 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줄리 앤드루스를 연상시킬 만큼 맑고도 힘찬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선동해 그녀에게 독창을 시켰다. 그녀는 사양하는 기색 없이 벌떡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불어 가사여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곡조만은 들어본 적이 있는 노래였다. 그녀는 노래를 썩 잘 불렀다. 그러나 청중의 호응이 별로 없었다. 선동자로서의 책임감에다가 그녀에 대한 미안함까지 있어서 나는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명곡해설을 하겠습니다. 방금 부른 노래는 원래 'Who has seen the wind?'라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영시에 붙인 곡이었죠. 불어 버전이라서 다들 알아듣지를 못해 아쉽군요. 다음 야유회 때는 제가 영어로 한 번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내 말에 박수를 치거나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계면쩍은 마음으로 주저앉았다. 야유회에 온 것 자체가 후회됐다.

 돌아오는 길에 학과장 교수께서 뒤풀이를 제안하셨을 때 나는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아 못 들은 체 딴전을 피웠다. 그녀가 말을 건넸다.

 “같이 가요. 아까 도와주느라고 수고도 하셨는데, 하하.”

 “수고요? 수고는 했죠. 그럼 한 잔 할 자격이 있는 거네?”

 뒤풀이에서 교수님이 잔을 올리는 나에게 한 말씀을 던지셨다.

 “자넨 제2외국어가 독어라더니 언제 불어까지 했었나?”

 “네, 실은 불어는 까막눈입니다.”

 “아니, 그럼 아까는? 거짓말이었나, 전부?”

 “아닙니다. 곡조는 아는 노래예요. 불어 가사는 잘 모르지만요.”



 나는 옆에 앉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교수님. 내용은 때려 맞춘 거예요.” 하고 거침없이 말하고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돌연한 웃음은 마치 누군가 숨겨져 있던 폭죽에 불을 붙인 듯 갑자기 하늘을 가르고 튀어나가 여름밤의 불꽃놀이처럼 높이 솟구치며 폭발하고는 부서진 불꽃의 파편들을 내 머리 위로 쏟아 붓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충고를 잊은 채, 그녀가 쏘아대는 산탄 총알 같은 웃음소리의 파편을 온 몸으로 받으며 빠르게 정신을 잃어 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끝도 없이 그녀의 웃음을 기다리며 사는 가련한 신세가 됐다. 나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내 병세는 날로 깊어져 삼 학년 가을 무렵에 이르러서는 거의 식물인간처럼 나 혼자의 힘으로는 거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녀는 어머니가 일러주신 좋은 여자의 모습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이미 내 마음의 주인이 돼 있었고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과도 같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완전히 중독 돼 있었다. 나는 고민했다. 그녀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를 불치의 병에 빠뜨린 그녀는 아무래도 나쁜 여자일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고 그녀를 떠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미리부터 마음이 허전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어느 긴 밤 끝에 어찔어찔한 아침이 왔다. 억지로 어떻게든 눈을 붙여 보려고 이쪽저쪽으로 돌아눕고 있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예상대로 그녀였다. 그녀는 아침 첫 회를 보려고 혼자 영화관에 왔다면서 아직 시간이 삼십 분 남았으니 빨리 그리로 달려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아니, 나, 밤을 새서 안 되겠는데.” 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왜 잠을 못 잤는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이제 그녀와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한 시간 이상을 더 뒤척거린 끝에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보였다. 나는 모퉁이 뒤에 숨어 있다가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칫 동작을 그쳤다. 그녀가 웬 남학생 하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교문 앞에서 어떤 남학생과 헤어지고 있는 그녀를 보고 달려가 “조금 전 그 사람은 누구야? 사귀는 사람?” 하고 물었다.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자꾸만 터지는 웃음의 사이사이에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지난번에, 하하, 나 혼자 아침 첫 회를 보던 날. 하하하, 영화 시작하기 전인데, 하하, 과자 파는 꼬마 애가 와서 초콜릿을 내밀데. 하하. 저쪽에서 누가 보낸 거래. 하하. 누가? 하고 쳐다보니까, 하하하, 바로 아까 그 애야. 그냥 받아먹으라고 손짓을 하고는, 하하하 하고 웃는 거야. 하하하. 나중에 영화 끝나고 하는 얘기가, 하하, 자기도 사귀는 여자 애가 안 본대서 혼자 왔는데, 하하하, 나를 보고 바로 알았대. 하하하. 남자 친구한테 바람맞았죠? 그러는 거 있지,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나는 너무나도 마음이 상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기다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 결심은 지켜졌다. 또한 그 뒤로는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게 됐다.

 벌써 이십오 년이나 된 일이다. 나는 그동안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완전히 틀어막고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자 문득 그녀의 웃음소리가 하늘 위로부터 들려오는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생각했다. 이십오 년 전, 내가 영화관 로비에서 그녀 앞에 얼굴을 내밀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무엇에 강력하게 이끌리듯 영화관을 향해 걸었다.

 날씨 좋은 날의 아침 첫 회.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시작시간이 다 돼서도 실내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한없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낀다.

 영화가 시작된다. 오 분쯤 지나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갑자기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저쪽 구석자리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무도 웃지 않는 장면에서 혼자 웃는 여자. 지금도 그런 여자가 있군. 옛날에 그녀가 바로 저렇게 혼자 웃었다. 웃음소리가 또 한 번 터진다. 다른 관객들이 그녀를 따라서 웃는다. '웃음 균의 보균자.' 나는 문득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을 느닷없이 전염시키는 웃음, 그것은 그녀만이 갖고 있는 웃음이었다.

 나는 점점 확신에 찬다. 오늘 아침 그녀 또한 이십오 년 전의 그 날이 떠올랐으리라. 그녀 또한 나를 잃어버린 그 날을 아쉬워하고 있을 테니까.

 영화는 이제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 주인공 남녀가 빗속에서 포옹을 하면 이어서 'The End'라는 자막이 나올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나는 그녀 앞에 우뚝 설 것이다.

 영화는 끝났고 이제 스크린에서는 스태프의 이름들이 긴 행렬을 만들며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서고는 있지만, 그녀는 불이 켜질 때까지 앉아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마침내 불이 켜진다. 나는 일어서며 뒤를 돌아다본다. 영화관 전체에 나 혼자만이 남아 있다. 옛날 그녀에게 초콜릿을 심부름하던 꼬마 아이보다 이십오 년 더 나이를 먹은 아줌마 하나가 청소를 하려고 실내로 들어서고 있다.

 로비가 매우 한적하다. 나는 아쉬움에 발을 옮기지 못한다. 문득 등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웃음소리이다. 나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젊은 여인들이 웃으며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 여인이 살짝 나를 쳐다본다. 살결이 약간 까무잡잡하다. 화장을 하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잘 꾸미지 않았다. 바지를 입고 경쾌한 걸음을 걷고 있다. 이십대 초반의 꾸밈없는 여인이다. 눈에 웃음이 가득 담겨 금방이라도 또 터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