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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호 2009년 7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李 仁 圭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 안녕하세요.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문화재위원회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부문으로 구성된다고 해도 그동안 줄곧 문화유산 부문, 그러니까 고미술이나 고고학 혹은 건축 분야 전문가들이 위원장을 맡아왔던 걸로 압니다.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위원장이 되신 건 李위원장님이 처음인데 어떻게 가능하셨는지요.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은 위원들이 선출합니다. 전체 위원들(80명)이 9개 분과위원장을 대상으로 투표해서 최고득점자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위원장이 부위원장을 추천하는 방식이죠. 이번 선거엔 65명 정도 참석했어요. 선거운동을 한 것도 아니니 어떻게 당선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연배도 제일 위고, 이번에 선임된 위원들 중 가장 오랫동안 위원을 지낸 사람이라는 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그동안 왜 문화유산 부문에서만 위원장을 맡았었나요.

 “문화재위원회의 경우 조선조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데서 출발하다 보니 자연히 문화유산 쪽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죠. 文化財(cultural properties)라는 말도 실은 일본과 우리나라만 사용합니다. 용어가 그렇다 보니 언젠가 청와대 비서실에서 `새를 어떻게 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느냐'고 질문해서 열띤 토론을 펼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의 손이 가해진 것이라야 문화재에 포함시키지 자연 분야는 빼버려야 한다는 도전도 계속됐어요.

 그렇지만 외국에선 국제적으로 culture라는 말 대신 heritage, 즉 유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도 외국처럼 유산개념인 heritage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를테면 자연유산(natural heritage)과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쓰자고 여러 번 제안했죠. 지금도 문화재청의 명칭을 표기할 때는 cultural heritage로 써요.

 기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기본적인 연구는 마쳤지만 대외적인 것까지 바꾸자면 법령과 모든 기록물을 다 바꾸는 엄청난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직까진 편의상 문화재라고 하는 거죠. 그래도 15년간 천연기념물분과위원장을 네 번 맡으면서 기본개념을 바꾸는 데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위원회 역사상 자연과학 분야에서 위원장이 된 건 제가 처음이니 그만큼 자연유산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달라졌다는 얘기겠죠.”


 - 위원장으로서 책임이 막중하신데, 특별히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는지요.

 “말씀드린 대로 용어를 문화재에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바꾸는 문제가 있고요. 예산 확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화재가 나오면 모든 개발 행위가 중단되는데, 사유재산이 걸려 있으니 문제가 심각합니다. 땅 주인의 고통도 심하고요.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려면 땅을 매입해야 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지금의 문화재청은 참 취약해요. 문화재청의 1년 예산이 4천5백여 억원인데, 보상 등에 거의 다 쓰이니 제가 맡은 분과는 연구개발 및 조사활동비로 연간 10억원도 안 나옵니다. 교수 한 명이 받는 연구비도 그 정도인데…. 이런 부분은 장차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 분과 구성은 어떻게 되는지요. 또 분과별 회의는 언제 어디서 하시는지.

 “지난 4월 6일 규정 개정으로 세계유산분과위원회가 새로 생겼고 현재 건축문화재, 동산문화재, 사적, 무형문화재, 천연기념물, 매장문화재, 근대문화재, 민속문화재분과위원회로 구성돼 있습니다. 회의는 분과별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고요. 문화재청이 대전에 있어서 보통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에서 모입니다. 회의실이 적어 분과마다 요일과 날짜를 정해 번갈아 사용하죠.”


 - 회의는 아무래도 심의 형태겠죠. 보통 어떤 단계를 거치게 되나요.

 “사실은 자문기구인데 심의 기능도 가지고 있어요. 무용, 음악 같은 무형문화재나 인간문화재를 지정할 땐 좀 다르지만 건축이나 사적, 천연기념물분과는 심의, 지정, 허가 순으로 진행됩니다.”


 - 문화재 위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지만, 실제론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파워풀하죠.

 “그렇습니다. 위원회에서 한 번 결정된 것은 문화재청장도, 대통령도 바꾼 적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죠. 문화재를 훼손하면 바로 형사 입건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위원들이 큰 책무를 가지고 일합니다.”





 - 천연기념물 및 세계유산분과위원장을 겸하고 계신데, 최근 세계유산분과에서 큰 성과를 이루셨죠.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한 결과 조선왕릉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지금까지 세계문화유산 8건, 세계자연유산 1건이 등재됐는데, 이번 성과로 문화유산은 9건이 됐죠. 제주도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국내 첫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는 데는 우리 분과가 주도적으로 관여했죠. 사실 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은 우리 고유의 것이니까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지정될 수 있지만 자연유산의 가치는 상대적이거든요. 한라산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세계에 아름다운 산이 한둘인가요. 그래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긴 굉장히 어려워요. 한라산의 용암동굴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뒤 외국 관광객이 1년 동안 배로 늘었어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려면 현지 주민들이 지역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현지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죠. 규제만 하면 관리가 안될 테니까요. 지정에 앞서 적절한 혜택과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기본을 따르려고 합니다.”


 - 국내 천연기념물로 최근 지정한 건 무엇인지요.

 “천연기념물분과 안에 명승 부문이 있습니다. 몇 년 전 경남 남해의 가천마을 산자락 `다랑이논'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5호로 지정했어요. 예전엔 다랑이논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지리산 자락과 남해에만 남았는데 지리산은 너무 훼손돼 가천마을만 지정했죠. 당시엔 주민들이 사유재산 침해다, 자유롭게 팔 수 없다 등등 얼마나 불평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명승지로 지정되니 관광객이 늘어나 요즘엔 좋아하죠.”


 - 그럼 다른 지자체에서도 로비를 하지 않나요.

 “사실 이번에도 자기 지역을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는 요청이 꽤 많이 들어왔습니다. 종래엔 그런 일이 적었는데 말이죠. 경쟁이 붙었어요. 어쨌든 시간이 흐를수록 보존 및 보호가 되지 않으면 훼손돼서 복원이 안되기 때문에 늘 초조하게 지내죠.”


 - 국내의 경우, 신청이 들어온 뒤 지정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나요.

 “신청이 들어오면 이를 조사하고 자료를 준비한 뒤 많은 논의를 합니다. 현장답사를 가야 할 땐 한두 달 이상 걸릴 때도 있어요. 결정이 내려지면 한 달간 공고에 부쳐 이의신청을 받습니다. 이의가 없으면 문화재로 정식 등록이 되죠.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몇 개월은 걸립니다.”


 - 지방에선 자기네 지역이 명승으로 지정되면 좋아하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

 “반드시 좋아하는 것도 아니에요. 인접한 곳에 사유재산이 있는 경우 아무래도 매매가 힘들고 값도 안 오르죠. 그럴 땐 우리 위원들이 가서 설득해야죠. 적당히 보상을 해주는 것이 원칙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문화재청 예산이 국가 예산의 0.2%도 안되니 힘들죠.”


 - 문화체육관광부가 부처 예산을 정부예산의 1% 이상으로 올리기 위해 굉장히 애썼는데요.

 “문화재청은 문광부 산하 독립청이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와는 별도로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문화유산 부문만 국가 예산의 1%를 넘게 받고 있어요. 사실 문화재청장이 차관급으로 격상된 것도 몇 년 안됐어요. 이전엔 1급 청이었습니다. 명승 분야도 전엔 담당하는 계조차 없었어요. 최근에 겨우 명승계가 생겼어요.

 차관급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예우를 받으니 예산도 올라가지 않아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해야 된다고 봐요. 말은 문화가 국가의 위상이라고 하면서 예우는 그렇지 않으니…. 문화재청만 해도 적어도 독립처 정도는 돼야죠. 문화재처보다는 국가유산처라고나 할까요, 그 정도는 돼야 제대로 발언할 수 있지 않겠어요.”


 - 현 정부의 4대강 개발 사업이 큰 이슈이고, 현실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문화재위원회의 일이 크게 늘어날 것 같습니다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얼마 안돼 라디오방송에서 인터뷰를 하자더니 질문을 해요. `전공이 식물학이시죠?' 하길래 `그렇다'고 했죠. MB가 4대강 개발을 통해 문화유산을 없애려다 보니 아무 것도 모르는 자연과학자를 위원장에 앉혀놓으면 편하겠다 싶어 저를 위원장으로 시켰다는 얘기가 인터넷 등에 떠도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MB가 80명의 문화재 위원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李仁圭를 위원장 시키라고 로비를 했나보죠. 제가 투표로 뽑혔거든요.' 그랬더니 막 웃어요. 4대강 유역에 결정적인 문화재가 있다면 당연히 고려돼야 하죠. 문화재를 훼손해가면서 개발하는 것은 안되니까요.”


 - 문화유산은 그렇다 치고요. 4대강 개발을 하다 보면 자연유산도 나올 수 있잖아요. 자연유산도 개발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국가 차원에서 봐야하는 문제들이죠. 예를 들면 현재 제주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를 놓고 NGO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반대하잖아요. 거기가 연산호 군락지로 천연기념물 보호구역 안에 들어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천연기념물분과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죠.”


 - 그런 경우엔 어떻게 대처하나요.

 “1년 전부터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어떤 영향을 미치고 훼손범위는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는 거죠. 객관적 데이터를 가지고 피해가 클 것 같다고 판단되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못하는 거고요. 그런데 국가적 차원의 사업이니 경중을 감안해 조금은 참아야 하는 부분도 있는 게 아닌지 등 여러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결과가 나올 예정입니다. 객관적 데이터가 나오면 결과에 따라 깨끗이 승복해야죠. 그게 기본적인 해법이고 문화재위원회의 기본 철학입니다. 조금이라도 편견이 들어가면 절대 안되죠. 원칙을 지키면 당시엔 떠들어대도 지나고 나면 잠잠해져요. 지난번 천태산 도롱뇽 때문에 국가적 이슈가 됐잖아요. 그러면 안되죠.”


 - 독도 전문가이시기도 한데 어떤 연유로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해양생물 분야와 관련이 깊어 1957년 대학생 때부터 수십 번 드나들었고, 스쿠버다이빙으로 생태조사도 많이 했죠. 현재는 독도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이 역시 우리 분과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국회 세미나에서 동독도와 서독도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 위에 호텔을 짓자는 말이 나왔는데, 실은 파도 때문에 독도에 들어갈 수 있는 기간이 1년 중 한 달밖에 안돼요. 지반이 약해 훼손되거나 낙반 사고 가능성도 크고요. 우리 국토인데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는 항의가 하도 많아 할 수 없이 접안시설을 만들어 거기에서만 왔다갔다하게 해놨습니다.”


 - 해양식물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참 생소한 학문이었을 것 같은데.

 “은사인 李敏載교수께서 북해도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서 해조분류학으로 세계적인 학자가 되셨어요. 전공은 식물생리학인데 분류학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줄 제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선배 둘이 맡았는데 전공이 달라져 저에게 미션이 떨어졌죠. 해양생물 중에서도 해양식물학, 쉽게 말해 김과 미역 같은 해조류 분류 연구를 해왔죠.”


 - 분류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많이 보고 만지는 게 굉장히 중요했을 텐데요.

 “국내 연안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채집했죠. 제가 만든 신종도 제법 돼요.”


 - 대표적인 식물을 소개해주신다면.

 “제주분홍풀이라고 유명해요. 붉은색 홍조류인데, 우묵가사리와 같은 그룹에 속합니다. 1cm 정도로 아주 예뻐요. 제주도 성산포 일출봉 바로 아래서 채집해 길러봤더니 新屬이었어요. 신속이라는 건 새로운 족보 혹은 성이 하나 생기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얼마 후 플로리다에서 같은 속에 들어가는 종이 두 개나 발견됐다고 보고돼 깜짝 놀랬죠.”


 - 요즘 해조류가 식량자원과 에너지원으로도 각광받고 있는데요.

 “정부에서 녹색 성장과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해조류가 각광받고 있죠. 최고급 종이도 해조류에서 뽑을 수 있고 이산화탄소 저감효과도 있어요.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주는 해조류를 대량 양식하는 곳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 몇 나라 안됩니다. 그런 부분을 잘 활용해 우리가 쿼터 할당을 받을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 즐겁게 연구했다지만 식물학을 하면서 나름대로 애로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평생 마이너리티로 살았습니다.(웃음) 기독교인이어서 운명적인 게 컸다고 봅니다. 진화론을 공부하겠다고 서원했는데 박사학위를 생각하지도 않았던 해조류 분류학으로 받았어요. 그런데 분류학이라는 게 단순히 종을 분류하고 새로운 종에 이름짓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성과 종의 분화, 뒤집어 생각하면 진화에 관한 영역까지 넘나들기 때문에 젊은 시절 서원했던 것을 결국 하고 있습니다. 인기학문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돼 자연보호중앙협의회 회장도 오래 맡았어요. 그런 인연으로 문화재 관련 일도 맡게 된 거고요.”


 - 자연과학대학 학장시절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죠.

 “학부제와 SCI 논문에 따른 교수평가제를 제가 도입했어요. 둘 다 욕을 엄청 먹고 있습니다.(웃음) 제 바로 직전 학장이 미리 정해진 학과에 따라 공부하는 건 소모적인 일이라며 부분적으로 학과를 통합시켰어요. 학장이 되고 보니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고, 나머진 대학원에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1학년 때부터 특정 과의 테두리 안에 넣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 단일학부로 통폐합하기로 했는데 교수들이 말을 안들어요. 그래서 대학원 학생들이 생활비를 받을 수 있도록 장학금을 얻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 결과 학부제라는 게 퍼지게 됐어요.

 또 전국대학 기초과학연구소연합회장을 겸하고 있을 때, 연구비를 좀 얻어보려고 했는데 과학재단 등에서 영 주지를 않아요. 공무원들은 교수가 연구비를 받으면 다른 데 사용한다는 생각밖에 없더라고요. 우리나라 GNP가 10위권 수준에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학문적인 잣대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하던 중 어느 교수의 SCI 논문이 40위권을 했더라고요. 그걸 보여줬더니 연구비를 줘요. 그 다음부터 교수연구를 SCI 논문으로 평가하는 거예요. 국내 저널들이 침체되는 부작용이 생기니깐 그것도 욕먹고 있습니다. 아마 오래 살 거예요.(웃음)”


 - 약주는 어느 정도 하세요. 취미는요.

 “전혀 안마시진 않지만 많이는 안 합니다. 바둑을 잘 둬요. 아마 3단 정도. 서울대 교수 바둑동호회가 있는데 별세하신 정치학과 金榮國명예교수, 李壽成 前총리, 崔松和 前부총장 등이 멤버였죠. 단과대학별 시합도 하고 그랬어요.”


 - 자녀 가운데 동문이 있으신지요.

 “큰아들(商敦 임학79 - 83)은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로 있고, 큰딸(希媛 대학원89졸)은 모교 교수학습개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둘째 아들(商勳)은 신학을 전공한 뒤 사업을 하고 있고요.”


 - 서울대 교수로서 학내는 물론 외부에서도 많은 일을 담당할 수 있었던 배경이랄까,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행정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숨은 비법이라도.

 “글쎄요. 저를 만나보시면 목에 별로 힘주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사실 행정을 맡는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학문만 한다는 생각에 논문만 2백50편 정도 썼죠. 그러던 중 50대의 늦은 나이에 교무부학장으로 임명돼 꼼짝없이 하게 됐죠. 그런 다음 연구소장과 학장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레 문화재위원회 일도 하게 됐고요.”


 - 대학신문에 보니 서울대생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조사결과가 실렸더군요. 제자들이나 자라나는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라면.

 “자연과학을 공부했지만 인문학적 관점에서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철학이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많고요. 철학은 인간이 사유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고, 역사는 생활과 관련된 내용이죠. 그런데 삶에서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줏대가 없다 고나 할까요, 방향을 못 잡아요. 자연과학을 하든 인문과학을 하든 기초학문을 충분히 배우고, 자기 나름대로 분석할 수 있어야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늘 강조하는 건 `공부하라'는 겁니다. 고시를 하든 박사학위를 하든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려면 전문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니 틈날 때마다 자기 계발을 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그런 열정 없이는 안되죠. 열정이 소명감으로 이어지면 누구든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어떤 일이 맡겨져도 잘하리라 믿어요.”

〈사진=李五峰논설위원ㆍ정리=表智媛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