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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009년 6월] 뉴스 본회소식

모교 개교 원년 재조정에 관한 연구보고서 下


 
    5. 일제 식민통치 하의 전문학교 변천과 경성제국대학 설립의 배경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 병합을 단행한 뒤 대한제국에서 뿌리내린 각종 고등교육기관에 대해 억제 정책을 폈다. 1911년 8월 23일 제1차 조선교육령은 한반도에서의 고등교육은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다.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령 74호 경학원 규정은 인문 교양 중심의 근대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시키고자 했던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1915년 3월 24일 일제는 民度와 고등보통교육의 보급도가 높아졌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총독부령 제26호로 `전문학교규칙'을 공포하고, 1916년 4월 1일부로 경성전수학교를 전문학교, 조선총독부의원부속강습소를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신설해 기존의 관립공업전습소를 이에 부속시켰다. 1918년에는 수원농림학교가 수원농림전문학교로 승격됐다. 실업학교를 이렇게 전문학교로 승격시킨 것은 일본인도 다닐 수 있는 학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종래의 사립학교들은 폐교되거나 지위를 격하해 고등교육에서 관립과 사립의 지위가 역전됐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의 교육차별정책에 시정을 가져왔다. 조선총독부가 1921년 1월 7일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 제출한 교육령 개정안에는 `대학 및 대학예비교육의 길을 연다'는 구절이 들어있었다. 이 안은 일본정부의 추밀원의 심의를 거쳐 1922년 2월 6일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발포됐으며, 이로써 `조선'에 대학설립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3ㆍ1만세시위운동으로 표출된 식민통치의 압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센 저항을 완화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취해온 교육정책상의 차별을 철폐 내지 시정한 것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3년 5∼12월간에 예과 교사를 신축해 이듬해 3월 19일 학생을 뽑고(문과 90명, 이과 80명) 6월 12일에 개교식을 거행했다. 1924년 5월 2일자의 경성제국대학관제는 법문학부와 의학부 설치를 규정했고, 이후 이날이 창립기념일로 됐다.

 경성제국대학은 만들어 가는 학교였기 때문에 후속 조치가 잇따랐다. 1926년 3월 15일 예과 1회 수료식이 있은 다음, 4월 1일에 동경제국대학 동양철학 교수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정식 총장으로 부임했다. 법문학부는 법률학과, 정치학과, 철학과, 사학과, 문학과의 5개 학과로 구성됐고, 이공학부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과 관련해 1941년에서야 설치됐다.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한국인들이 벌인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1922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사설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는 그간에 팽배한 한국인들의 대학 설립에 관한 열망을 담았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1922년 11월 이상재 등이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했고, 1923년 3월 전국 1백70여 군에서 1천명 이상의 발기인을 확보한 상태로 3월 29일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발기위원회가 개최됐다. 기성회는 관립대학의 설립이 곧 실현될 것을 전망하면서 이에 대응해 민립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 운동 때문에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운동을 주도한 이상재가 경성제대 개교식에 참석하면서 이 학교를 `우리 민립대학의 개교인 셈'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조선인들의 대학 설립에 대한 열망이 경성제국대학 설립 과정에 영향을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6. 광복 후 미군정의 `경성대학 종합대학안'과 `국립서울대학교안'

 1945년 8월 15일의 광복과 함께 식민지하의 경성제국대학이라는 교명이 없어졌다. 광복의 만세 함성 속에 누군가 교문에 붙은 현판 `경성제국대학'에서 `제국'이라는 두 글자를 가리면서 `경성대학'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16일에 미군정청 법령 제15호로 경성대학이란 이름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어 10월 16일자로 법령 제16호를 발표해 경성대학 및 각 급 학교의 한국인 책임자들을 임명했다.

 경성대학은 이상과 같은 조치로 제국대학의 틀을 벗어나 한국인의 대학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이즈음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확대 발전시킬 방안을 따로 구상하고 있었다. `경성대학 종합대학안'(약칭 `종대안')으로 불리는 계획이 1946년 초 미군정이 작성한 `學務局史'(History of Bureau of Education from 11 September 1945 to 28 February 1946)에 소개돼 있다. 이 `종대안'은 경성대학을 7개 대학과 1개 대학원의 종합대학으로 확대 개편하려는 구상이었다. 총장-부총장-학장, 행정위원회-교무위원회-교수회의 등의 조직 구성도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그러나 국립서울대학교는 이 `종대안'이 아니라 경성대학과 기존의 여러 전문학교들을 통합하는 `국립서울대학교안'(이하 `국대안'으로 약칭)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6년 7월 13일 미군정의 한국인 문교부장 유억겸과 미국인 문교부장 피팅거(Aubrey O. Pittinger)중령은 `국대안' 추진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이어 8월 22일에 법령 제102호로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기존의 10개 학교 즉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및 경성대학 등을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해 9개 단과대학(농림과대학, 상과대학, 치과대학, 사범대학, 공과대학, 예술대학, 법과대학, 문리과대학,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둔다고 했다. 경성제국대학을 잇는 경성대학 자체는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 및 공과대학으로 해체된 셈이다.

 서울대학교는 흔히 이야기하듯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이 결코 아니다. `국대안'에 따라 만들어진 서울대학교에서 경성제국대학(또는 경성대학)은 10개의 뿌리 중 하나일 뿐이다. 서울대학교의 뿌리에는 경성제국대학과는 다른 전통과 역사를 가진 학교들이 훨씬 더 많이 연결돼 있다. 경성제국대학의 존재에 대한 과민한 반응으로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력 근대화의 성과로 거둬진 역사적 유산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과오는 없을 것이다.

 7. 국립서울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의 `혼돈'과 그 청산의 길

 국립서울대학교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여러 계통의 학교들을 통합하는 형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 서울대학교는 설립 후에도 오랫동안 유기적인 종합대학교로 면모를 일신하지 못하고 단과대학 단위의 개별성이 지속됐다. 즉 각 단과대학이 상당한 기간 인사 및 재정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여 `연립대학교'의 모습을 보였다. 서울대학교의 이런 연립대학적 면모는 분산된 캠퍼스 생활로 증폭돼 단과대학별의 상이한 기질과 분립의식을 키웠다. 그리고 학교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도 본의 아닌 혼란이 빚어졌다.

 종합대학교로서의 서울대학교는 1946년을 개교 원년으로 이해하고 1966년의 `서울대학교 20년사'를 비롯해 그간의 모든 교사 정리가 이 이후의 역사만을 대상으로 했다. 2006년의 60년사에서 비로소 근대의 고등교육기관의 역사를 `前史'로 다뤄 역사적 연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처음 시도했다. 한편, 단과대학들 가운데는 1946년 이전의 전문학교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간주하고 개교 원년을 전문학교의 개교일로 잡는 경우도 있었다. 1946년 이후 역사만을 다루는 서울대학교의 공식 역사와 1946년 이전 역사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몇 단과대학의 역사인식은 변명할 여지없는 하나의 혼돈이었다. 서울대학교의 역사는 60년인데 단과대학의 역사는 1백년으로 잡는 것에 대해 누구도 문제를 삼으려 거나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의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한 가지 문제가 더 방치돼 있었다. 개교기념일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은 10월 15일로 돼있다. 그런데 이 날이 개교기념일이 돼야 하는 역사적 근거가 기록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뿐더러 언제부터 10월 15일을 개교기념일로 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현재 개교기념일과 관련한 가장 확실한 자료는 1952년 10월 15일에 단과대학별로 제6회 개교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라는 1952년 10월 13일자 `대학신문' 기사이다. 1940년대 말 학칙 제정 당시 개교기념일이 10월 15일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역시 아직은 추론에 불과하다. 10월 15일 개교기념일이 학칙 제정 당시 결정됐다고 하더라도 왜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1945년 광복 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서울대학교 역사상 10월 15일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나 행사는 없다. 시야를 개항기나 일제강점기로 소급해 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미군정이 1946년 10월 16일에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한 날이 가장 근접한 날로 찾아지지만, 이 인수의 건은 엄밀히 말하면 국립서울대학교 탄생과는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국립서울대학교의 구성원은 지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개교기념일의 역사적 근거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습관처럼 10월 15일에 개교기념일 행사를 치러온 꼴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교의 역사인식과 단과대학의 역사인식이 서로 어긋나는 문제점을 발견하거나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찾아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과민한 거부감으로 근대(고종시대)에 자력으로 이뤘던 관립고등교육기관의 역사가 국립서울대학교의 연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외면하는 우가 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의 학교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을 기대하기는 물론 어렵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자부심은 오히려 약해지는 추세였다.

 근대의 관립고등교육기관의 역사를 개교 원년의 근원지로 택한다면, 1895년 5월 6일에 시작한 법관양성소가 선두에 선다. 이 날을 개교 원년으로 정하면 2010년으로 서울대학교는 1백15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2010년은 1910년에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 당한 지 1백년째가 되는 해이다. 이 해에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 원년을 새롭게 천명한다면 그것은 일제 침략의 독소를 말끔히 씻는 국가적 이벤트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