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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2009년 5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국산 1호 경비행기 설계한 李元馥동문




 집에 들어가자마자 곳곳에 놓인 작은 비행기 모형이 눈에 들어온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부활호도 있어요?'라는 질문에 국산 1호 경비행기(문화재 411호) '復活'호 설계ㆍ제작자인 李元馥(조선항공46 - 50)동문이 조심스레 한 개의 비행기를 아기 다루듯 들어 보인다. '이왕이면 비행기도 같이 찍히게 포즈를 취해주세요'라고 하자 금새 편안한 자세로 비행기를 가리키며 당시의 일화들을 풀어놓는다.

부활호, 문화재 411호로

 "대학 졸업 후 공군기술학교 정비교육대 정비과장을 하면서 부산 전시연합대학에서 공대 항공공학과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었어요. 당시 패전국인 일본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항공산업시설을 모두 없애버린 상태였죠. 그래서 1953년 6월 공군기술학교장이 국산 항공기를 제작해 연습기로 활용하고 우리나라 항공산업을 한 번 발전시키자고 해 설계와 제작을 맡게 됐죠."

 李동문은 곧바로 팀을 구성해 도면과 부품제작을 병행하면서 4개월 만인 그해 10월 11일 단 한 번의 제작으로 국산 1호 경비행기를 완성해 시험비행에 성공했으며, 李承晩대통령으로부터 '復活'이라는 휘호를 받아 1954년 4월 3일 김해기지에서 명명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했던 국내 최초의 국산 비행기는 그러나 李동문이 미국에서 정비관리교육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대구 항공대학에서 연습기로 활용되다가 미국 항공기회사인 Cessna에서 개발하고 있던 O-2 항공기의 설계에 참고자료로 활용됐다는 풍문이 돌아 직접 가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제작된 O-2 항공기를 보니 부활호와 비슷해요. 선진국인 미국에서조차 우리나라 기술을 인정할 만큼 소중한 국가의 자산이었는데….

 외국에서 무기를 비롯한 많은 장비들을 수입하다 보니 뭐 하러 우리나라에서 고생하며 만드냐는 인식이 많아 관심 속에서 사라져버렸죠. 좀더 적극적으로 정부에서 항공산업 육성을 지원했더라면 지금의 항공산업 위상은 크게 달라졌을 거예요."

 李동문이 이토록 비행기에 애착을 갖는 것은 중학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전 당시 일본 사람들이 조종사 양성을 위해 또래 학생들에게 글라이더(glider)로 비행연습을 시켰어요. 滑空機라고도 하죠? 엔진, 프로펠러 등의 추진장치가 없는 경비행기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중학생 때부터 조종기술을 배워 창공을 날아오르며 '비행기가 내 운명이구나' 했죠."

 부활호가 말 그대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지난 2003년 라이트형제 비행 1백주년을 기념해 자신을 찾아온 한 기자의 덕택이었다. 

무장 헬리콥터 수출하기도

 "우리나라에도 기념할 만한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길래 자랑스럽게 부활호 얘기를 꺼냈죠. 그래서 일간지에 '국산 1호 항공기 부활을 찾습니다'라는 기사를 냈는데 대구경상공고 퇴직자가 학교 지하창고에서 봤다고 제보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2004년 1월 드디어 영원히 묻힐뻔한 부활호를 찾아내고 그해 5월 공군에서 회수해 10월 22일, 부활호 복원에 성공했죠."

 현재 딱 1대 복원된 부활호는 공군사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항공산업의 본고장인 경남 사천시에서 두 대를 추가로 복원해 2010년부터 매년 기념행사에서 이를 띄울 예정이다.

 "의미없이 하늘에 띄우지만 말고 성능이 좋고, 좋은 재료를 사용해 개량된 비행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힘닿는 데로 열심히 도와야죠. 항공우주산업이야말로 선도산업이라고 생각해요. 자동차에 ABS가 붙었죠? 원래 비행기에 있는 건데, 비행기 조종석 설계와 똑같아요.

 바라건데, 항공우주산업은 대통령이 관심산업이라고 생각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봐요. 규모가 크고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기술자를 많이 양성해 기초산업을 튼튼하게 키워야해요. 그런 좋은 제품을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어서 역으로 수출하면 얼마나 좋아요."

 李동문은 신진자동차 생산 기술담당자로 코로나 개발 담당자로 활약했고, 대한항공 항공정비본부장 및 항공기생산사업본부장 시절엔 우리나라 최초의 군용 무장 헬리콥터인 MD-500 등을 제작해 해외에 수출하기도 했다.

 "원자재가 없으니까 미국회사의 도움을 받아 멋있게 만들었죠. 그래서 우리나라 외의 나라가 이 제품을 구입시 우리한테 기술료를 주도록 했어요.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아무도 몰라 이 사실을.(웃음)"

 李동문의 가족 중에는 장남 李宗遠(공업교육74 - 78)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 차녀 李明恩(화학79 - 83)미국 Winona주립대 화학과 교수, 차남 李承遠(미생물83 - 87)LG생명과학기술연구원 수석부장이 동문이다. 거실에 놓인 해맑게 웃고 있는 젊은 청년의 사진을 또 다시 들어보인다.

장남ㆍ손자도 항공분야전공

 "손자도 오스틴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대학원에서 항공산업 분야를 공부할 예정이에요. 음악가든 정치가든 3대가 같은 분야에서 대를 이어야 그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고봐야죠. 열심히들 하고 있습니다.(웃음)"

 인터뷰 말미에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온다.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언제지? 그날 안산에서 에어쇼가 있어서 자문하러 가야되는데. 다음날로 하자구. 그래!"

 李동문의 나이 여든 넷. '한번 공군은, 영원한 공군'이라는 외침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