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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2009년 5월] 뉴스 본회소식

개교 원년 바로 찾아 서울대 역사 다시 쓴다!




 1. 국립서울대학교의 모체는 경성제국대학이 아니다.
 서울대학교는 1946년 8월 22일 미군정 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의 공포에 의해 대학원과 9개 단과대학을 갖춘 종합대학교로 설립됐다. 현재 서울대학교는 이 해를 개교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는 1946년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대학이 아니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9개의 전문학교들과 1개의 대학이 합쳐져 서울대학교로 된 것이었다. 9개 전문학교 중 경성법학전문학교는 1895년 설립된 법관양성소,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는 1895년 설립된 한성사범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899년 설립된 의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ㆍ경성공업전문학교ㆍ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04년 설립된 농상공학교를 각각 뿌리로 하고 있었다.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이었던 경성대학의 비중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2.국내외 다른 대학들의 개교 원년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 종합대학교로 인가 받은 국내 10개 대학(서울대 제외)의 경우 사소한 연결고리만 있어도 가장 빠르고 작은 시작점을 개교 원년으로 삼았다. 학생 1명으로 출발한 이화여자대학교나 유치원에서 출발한 중앙대학교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국대학교나 한양대학교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 학교의 역사도 설립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현재의 학교 역사에 포함시켰다. 서울대학교처럼 대규모 종합대학교로 출발 혹은 통합하는 시점을 개교 원년으로 삼는 경우는 전혀 없다.

 반면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해 만들어진 연세대학교는 연희대학교가 종합대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단과대학에 불과한 세브란스의과대학의 개교 원년인 1885년을 통합 연세대학교의 개교 원년으로 정했다. 여기에는 1885년의 병원(광혜원) 설립을 바로 의학교 개교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영국 The Times 선정의 2008년 University Top 50위 내 대학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이다. 공동 50위를 차지한 서울대를 제외하고 총 51개 대학(공동 50위 대학이 3개)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졌다. A유형은 대학의 역사가 '단선적인 성장과정'을 보이는 경우이다. 다른 말로하면 독립적이고 대등한 기관들이 통합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의 시작점에서 꾸준하게 확대 발전한 경우이다. B유형은 대학이 성장하면서 독립적이고 대등한 기관들이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 경우이다. 새로 조명된 국립서울대학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과정에 해당한다.

 A유형 42개 대학 중에는 38개 대학이 아무리 작은 규모라 할지라도 현 대학과 연결되는 가장 빠른 최초의 시점을 개교 원년으로 삼고 있었다. 대학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하버드대의 경우 1636년 교사 1명과 학생 9명으로 시작된 식민지 매사추세츠주의 '목사양성소'를 시원으로 하여 이 해를 개교 원년으로 삼았다. 5위인 캘리포니아공대, 10위인 컬럼비아대, 12위인 프린스턴대도 각각 10명 이하의 학생으로 출발한 해를 개교 원년으로 삼았다.

 B유형 9개 대학의 경우도 현 서울대학교 개교 원년 방식처럼 통합 시점을 개교 원년으로 삼는 경우(4개 대학)보다 반대로 통합 이전 각 기관의 원년 가운데 가장 빠른 시점을 개교 원년으로 삼는 경우(5개 대학)가 약간 더 많았다. 예를 들어 1967년 카네기공대와 멜론연구소가 통합해 만들어진 카네기멜론대(21위)와 2004년 맨체스터이공대와 맨체스터빅토리아대가 통합해 만들어진 맨체스터대(29위)는 통합 전 학교들의 개교 원년 중 가장 빠른 1900년(카네기공대의 전신인 카네기공업학교가 설립된 해)과 1824년(맨체스터이공대의 전신인 맨체스터공업학교가 선 해)을 각각 개교 원년으로 정했다.


 3. 근대화와 관립고등교육기관의 설립과 성과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국가정책의 방향을 부국강병책에 두고 '舊本新參'의 슬로건 아래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우선 서양 신문명을 이해하는 관료 양성을 위해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신식학교를 직접 설립하거나 인가했다. 1883년의 同文學은 외국어뿐만 아니라 서양지식도 가르쳐서 정치 경제에 관한 지식을 갖춘 실무관료 양성을 목표로 했다. 1885년 이후에는 선교사의 신식학교 설립을 허가하기 시작했다.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스크랜튼이 세운 학교에 대해 왕과 왕비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같은 해 조선 정부는 育英公院을 설립해 외교, 통상의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목표로 했다. 다른 한편으로 成均館을 비롯한 유학 교육기관을 현대화하고자 1887년에 서울에 京學院, 각 도에 營學院, 큰 고을에 官學院을 설립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힘을 배경으로 친일관료 양성을 목표로 고등교육기관 설립에 간여하려 들었다. 그래서 군주 고종은 한때 미국 선교사들의 원조 하에 독립적인 왕립대학을 만들고자 했고, 1895년 2월 16일 아펜젤러가 운영하는 배재학당과 위탁교육 계약을 맺고 2백명의 관비 장학생 입학 계획도 세웠다. 1895년 4월 19일 전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의 법제를 정비해 5월 6일(음력 4월 12일) 입학시험과 함께 법관양성소를 개소했다. 5월 17일(음력 4월 23일) 50여 명의 입학생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입학 후 8개월만인 1895년 12월 25일 47명이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됐다.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지낸 咸台永이 수석으로 졸업했다. 1907년 고종황제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李 儁열사도 1기생이었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법학교 - 경성전수학교 - 경성법학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이어진다.

 1895년 5월 10일 學部는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漢城師範學校官制'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1895년 10월에 처음으로 6개월 과정의 速成科 졸업생이 배출됐는데 이후 1906년에 이르기까지 7회에 걸쳐 총 1백95명의 졸업자가 나왔다. 한성사범학교는 훗날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진다.

 1895년 4월 삼국간섭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됐지만, 10월에 왕비시해 사건이 일어나 정국이 소용돌이쳤다. 군주 고종은 1896년 2월에 일본의 압박이 가해지고 있는 경복궁을 벗어나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주해 군주권을 회복하고 1897년 10월에 국체를 대한제국으로 바꿔 근대국가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추이의 일환으로 정부는 그동안 유보됐던 관립고등교육기관 설립 및 개선의 사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했다. 1895년 9월 27일의 '성균관경학과규칙'이 성균관에서 경전 공부와 아울러 시무에 필요한 역사나 지리에 대한 교육을 시키도록 했다. 1896년 7월 16일 '성균관경학과규칙' 개정은 사범학교의 고급학도를 성균관에 진학시켜 명실상부한 최고 학부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인문교육의 전통을 발전적으로 잇고자 했다.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이 출범한 뒤, 1899년에는 기술교육 분야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즉, 3월부터 의학교, 중학교, 상공학교 관제가 연달아 제정되고 개교했다. 1899년 7월 5일 공포의 '의학교규칙'은 의학교를 장차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후 의학교는 대한의원 교육부 - 총독부병원 부속의학강습소 -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진다.

 상공학교는 1899년 6월 15일에 설립에 관한 청의서가 제출돼 6월 28일 반포됐다. 그러나 이 학교는 바로 개교되지 못하고, 대신 1900년 9월 4일에 '鑛務학교관제'가 반포됐다. 같은 해 郵務學堂과 電務學堂이 개학해 내실 있는 운영이 이뤄졌다. 1904년 6월 8일에는 1899년에 관제가 정해진 상공학교를 실행하는 뜻으로 새로 '농상공학교관제'를 만들어 9월부터 학생을 모집했다. 이후 농상공학교는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이어졌다.


 4.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 속 관립고등교육기관의 변천과 왜곡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하나씩 탈취하기 시작했다. 고종황제와 정부는 일본의 방해를 피하고자 관립학교 대신 사립학교의 설립을 지원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1905년 4월 普成전문학교의 설립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 학교는 李容翊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재정을 지원한 王立學校였다. 고종황제는 국권이 위협받아도 교육이 나라를 지킬 것이란 신념에서 1906년 3월 26일 '私學 설립 조칙'을 따로 내려 애국계몽운동에 열기를 더하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된 이후 관립고등교육기관도 큰 동요를 겪었다. 사실상의 국권 상실을 뜻하는 이 조약이 발표되자 법관양성소의 교관들과 학생들이 반대의 뜻으로 휴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곧 소장과 교사가 일본인 또는 일본유학생 출신으로 바뀌었다. 1909년 11월 1일에는 법부에서 학부로 소관이 넘어가면서 법학교로 이름이 고쳐졌다. 한성사범학교는 1911년 폐지되고,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에 새로 설치된 사범과 및 부설 임시 교원양성소로 계승된 후 1921년 다시 관립경성사범학교로 승계된다. 의학교는 1907년 3월 10일 '대한의원관제'가 반포됨으로써 내부병원인 廣濟院, 대한적십자병원, 육군병원 등을 통합한 大韓醫院의 교육부가 됐다. 이후 1909년 2월 '대한의원의육부부속학교', 1910년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변천됐다.

 농상공학교는 1906년 9월 1일 농림학교, 1907년 선린상업학교, 관립공업전습소, 1908년 수의속성과 등으로 분화됐다. 이후 농림학교는 1910년 권업모범장 부속 농림학교, 1918년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관립공업전습소는 1912년 중앙시험소 부설 공업전습소,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설로 다시 개편됐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종시대에는 시종 국가(정부)가 주도하는 고등교육기관 설립 시도가 있었고 실제로 상당한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이 때 만들어진 법관양성소, 한성사범학교, 의학교, 농상공학교 등이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도 계속 그 실체를 유지해 광복을 맞이함으로써 미군정아래서 출범한 국립서울대학교의 모체가 됐다. 고종시대에 자력으로 이뤄낸 성과를 국권을 빼앗겼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한다면 이는 국내외의 명문대학의 전통 계승의 관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일제의 식민주의에 대한 지나친 배격의식으로 제 것을 버리는 우를 범하는 꼴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